뜻풀이엽편 | 유연하다

그 무엇도 섣부르게 단정짓지 말고 천천히 부드럽게 여유롭게

by 담화

장민주는 문 앞에 떨어져 있던 택배를 주워 들었다. 학교에서 받을까도 생각했지만 누가 뭘 주문했는지 관심이 지대한 옆자리 박 선생에게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꽤나 성가셨다. 자기가 주문한 책이 뭔지, 왜 이런 걸 굳이 샀는지를 설명하자면 다들 괴상한 얼굴이 될 것이 뻔했으니까. 글쎄, 또 모르지. 최호경 선생이라면 눈을 빛내면서 정말요? 하고 좋아했을지도.


며칠 전 아이들이 쓰는 어휘가 협소하기 짝이 없다고 걱정을 늘어놓던 최호경의 모습이 떠올라 절로 웃음이 났다. 잔뜩 흥분한 듯한 모습에 조금 시큰둥하게 반응했더니 서운해하는 티가 팍팍 나는 것이 귀엽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조금만 힘을 빼면 좋을 텐데. 그 의욕은 높이 살 만했으나, 조금만 기가 꺾이면 뚝 부러질 것 같은 불안함이 엿보였다. 정말로 뭔가를 바꾸고 싶다면, 좋은 방향으로 변하게 하고 싶다면 낭창낭창하니 나긋하게 노선을 잡는 쪽이 훨씬 효과가 좋았다. 그런 것도, 최호경 선생처럼 의욕이 넘쳐흘러 종종 무릎을 꺾고 좌절하는 순간들을 겪어본 뒤에나 알게 되는 것이었지만.


택배를 뜯자 책 한 권이 봉투에서 슬쩍 미끄러져 나왔다. 해외주문을 해야 하는 원서였던지라 다른 책들과 묶지 않고 별도로 주문했더니 박스가 아닌 버블이 가득한 봉투에 넣어져 왔다. 그 봉투란 것도 나름 서점에서 따로 디자인해 제작한 것인지 제법 귀여웠다. 마음 같아서는 그 캐릭터 부분만 오려서 다이어리에 붙이고도 싶었지만, 택배 차량 안에서 얼마나 굴렀던지 까맣게 때가 탄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건 그만두기로 했다.

[HOW TO TEACH YOUR CHILDREN SHAKESPEAR]


민주가 막 끄집어낸 봉투 안에 들어있던 원서의 제목이었다. 미국에 사는 민주의 친구가 지나가듯 해 준 이야기였다. 자신이 종종 즐겨 듣는 팟캐스트의 호스트가 이 책의 저자를 게스트로 초빙해서 이야기를 나눈 회차를 들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꽤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저자의 조언대로 정말로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의 첫 문단을 함께 암송하기 시작했는데, 매일같이 한 문장씩을 늘려가며 외워가던 아이가 마침내 한 단락을 완전히 암송하게 된 순간 깜짝 놀란 얼굴로 엄마, 이거 진짜 놀라워. 한 구절씩 외울 때마다 눈앞에서 그 문장이 진짜로 살아나, 라며 감탄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민주는 문득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렸다.

햄릿이야말로 바로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보통의 인간에게 가장 결핍된 자질을 구현하고 있는 인물이지. 민주가 생각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셰익스피어가 이 한마디 안에 밀어 넣은 애매함, 알쏭달쏭함은 제각각의 안개를 드리운 채 그 문장 안에 헤아릴 수 없는 수의 독자를 모호함의 제물로 삼았다. 불가해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문제를 앞에 둔 자의 황망함이란.

그는 후에 존 키츠가 말한 NEGATIVE CAPABILITY, 즉 소극적 수용 능력이라고 부르는 자질을 내면화한 최초의 인물이며, 불확실성을 견디고 모호함을 버티며 답을 찾아가는 영웅적인 인물이 되었다. 적어도 민주는 그런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민주가 학생들에게 가장 전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실컷 고민하고 갈등하고 흔들려라.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축복이다. 사회가, 환경이, 부모가 의도적으로 부여하는 서사적인 역할을 거부하고 너 자신의 고유한 역할과 정체성을 찾아 분투해라.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불안함은 누구나 공평하게 지불하는 세금 같은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나도 마음껏 불안해해도 괜찮다. 나 혼자만 불안한 것이 아니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 떨어진 모든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이니까. 충실하게 보내는 하루하루가, 그렇게 쌓인 나날들이 우리의 존재가 시류에 떠밀려 사라지지 않게끔 북돋아 줄 테니까. 그저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이것뿐이다, 하지만 않으면 되니까. 우리는 민들레 홀씨나 다름없고, 그러니만큼 어디에서든 어떻게든 잘 해낼 테니까. 스스로의 시간을 믿으면 되니까.

순식간에 자신만의 상념에 깊이 빠져들었던 민주가 흠칫 놀라 생각의 수면 위로 머리를 순식간에 내밀었다. 간혹, 이렇게 지나치게 몰입하면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방향을 잃기가 부지기수였다. 책을 들어 파라락, 넘겨보던 민주가 빙긋이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그러니까, 우리 각자의 햄릿 각본을 쓰자, 얘들아. 햄릿은 원래 휘청거리게 쓰인 캐릭터라니까.”





[표제어_유연하다/모티브_Ken Ludwig 「How To Teach Your Children Shakespear 」]

사진: UnsplashMax Musel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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