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쳐나왔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오후 3시 퇴근이 가능한 금요일이다. 땡 하자마자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오, 3퇴야 3퇴?”
복도에서 마주친 동료가 묻는다. 겉으로 웃지만 마음은 갑갑하다. 회사에서 빠져나와 버스를 탔다. 서점에 내려 읽고 싶었던 책을 두 권 샀다. 가까운 카페에 자리를 잡고, 키보드를 꺼냈다. 메모장을 열어 글을 쓴다. 얼마만이지. 이제 조금 살겠다.
올해 상반기 나를 지배한 정서는 그다지 밝지 못했다. 무력감이랄까. 연초부터 시작된 허리 통증 때문에 계획했던 루틴과 목표들을 모두 포기했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냥 달리기와 글쓰기를 좀 더 제대로 해보겠다는 뭐 그런. 회사에서는 새로운 팀에 배치됐다. 낯선 업무와 관계에 적응하며 나의 부족함을 자주 대면하는 중이다.
뜻밖의 변화들을 받아들이려 애쓰면서 조금 지친 것인지, 한동안 아침에 일어나면 마음이 휑했다. 일상적인 무력감에서 더 나아가 삶을 대하는 나의 본질적인 무력함에 대해서 종종 생각했다. 예를 들면 죽음 같은 것. 나는 반드시 죽는구나.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이별은 피할 수 없구나. 최근의 지친 마음과 이런 절대적인 사실들이 머릿속에서 버무려질 때면 삶의 의미와 이유가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왜 살지?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어떤 의지로 사는 걸까?
뜬구름 같은 마음의 방황이 지겹다. 예전에는 단순히 업에 대해 고민하는 정도였는데,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내 정신이 좀 이상해진 건 아닌지 걱정도 된다. 하지만 삶에 대한 질문에 내가 의지할 만한 답을 찾고 싶다는 욕구도 외면하기 어렵다. 아마 좀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일 거라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런 와중에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게 된 건 참 감사한 일이다. 정신분석가인 저자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해 발견한 삶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문장을 정말 여러 번 읽었다. 내가 해야 할 건 질문이 아니라 대답이구나. 오늘 내가 선택하는 태도와 행동이 곧 의미가 되는 거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삶의 물음에 의지적으로 반응해야 할 이유는 뭘까? 의미없이 대충 살면 안되는 걸까? 책에서 내가 건진 답은 ‘유일함’이다.
“인간은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할 특정한 일과 사명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삶 역시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각 개인에게 부과된 임무는 거기에 부과되어 찾아오는 특정한 기회만큼이나 유일한 것이다.“
사회는 직장인의 처지를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부품‘이라 표현하곤 한다. 나 역시 조직의 뜻에 따라 여러 번 팀을 옮기면서, 직원을 장기말이나 카드패 따위로 묘사하는 주변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인 적도 있었다. 회사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치자. 하지만 그런 시쳇말을 내 삶을 대하는 나의 관점으로 삼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저자가 짚어 준, 나를 살 수 있는 건 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삶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책임감을 느끼게 해준다.
우리는 유일함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대표적으로 사랑이 그렇다.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는 것”
사랑에 대한 저자의 정의가 너무 아름답다. 마음이 위태롭게 느껴지던 날에도 아내와 아들 곁에 있는 순간만큼은 아무렇지 않았던 걸 보면, 사랑에는 분명 의미가 가득하다. 그런데 그게 어디 타인에게뿐일까. 이 세상 속의 나라는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서 이해하고 체험하려는 의지 역시, 삶을 더 아름답고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일테다. 방황의 상반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하반기는 나를 힘껏 긍정하고 사랑하며 삶의 물음에 풍성하게 답하는 시간들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