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
시어머니는 멋쟁이셨다. 아름다운 까르띠에 시계를 차고 샤넬백을 드셨다. 어머님과 함께 그 지역 백화점을 방문하면 이세미야키나 루이뷔통 매니저가 인사를 하며 차를 내왔었다. 지역 유지로 자리를 잡으시며 각종 계를 비롯한 여러 모임의 멤버가 되시며 인싸노릇 자처하며 모든 모임에 참석을 하셨고 댁에서 모임이 있을 때는 며느리들을 불러 음식과 다과를 준비하게 하셨다.
여기서 문제는 시어머니가 멋쟁이시거나 , 모임에 나가면 돈 쓸 줄 아는 인싸이신 게 아니고 친구들 앞에서 나는 며느리를 이렇게 까지 부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모임에 며느리를 동원시킨다는 데에 방점이 찍힌다.
그 당시에 나는 결혼과 동시에 퇴사를 하고 남편의 고향이자 시부모님의 사업장이 있는 소도시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사실 내 의사보다 남편의 의사가 더 반영된 결정이었다. 남편이 어머님의 사업장을 물려준다는 계약에 넘어가서였다. 시어머니는 큰아들이 서울에서 자리 잡느라 고생하는 것보다 지방에 내려와 내 것을 물려받으면 나처럼 돈을 쓰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주입시켰다. 자영업의 고통, 식당사업의 노동강도 같은 현실적인 어려움은 모른 체 우리는 꿈에 부풀어 그 도시로 향했다.
막상 귀향하자 아들은 식당 일이란 노동강도에 비해 월급은 아주 작다는 현실을 깨달았고, 며느리는 어머님에게 용돈을 받기 위해 어머님의 모임에 동원되어 앞치마를 입고 과일을 깎아 준비하는 현실을 마주한다.
그 어떤 연고도 없는 도시에서 지인은 시부모님과 시 동서네 뿐이고 시 동서네는 이미 그런 삶을 착실히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시부모님은 두 아들과 두 며느리를 은근히 경쟁시키며 누구든 나에게 잘하는 자식에게 더 준다는 사실을 강조하셨고 시 동서는 어리석게도? 그 말도 안 되는 경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친구는 남편뿐인 상황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며 살아가는 건 외롭고 사무치는 일이었다.
결혼 전 나의 커리어 대신 선택한 내 남편의 부인도 아닌 내 시부모님의 며느리로서의 지위도 그에 따른 보상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큰 아이의 돌 무렵. 남편은 시부모님의 사업장을 물려받기 위해서 어머님 밑에서 일하는 동안의 급여와 복지로는 가장의 역할을 하기 힘들 뿐 아니라 부인이 포기한 기회비용을 채워주기도 힘들다는 걸 깨닫고 자기만의 사업을 도모하느라 너무나 바빴다. 여자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큰아이 돌 전까지인데, 그 시간을 독박육아를 하며 가장 큰 외출은 아이를 보여주러 시부모님을 만나러 나가는 것뿐인 시간을 살며 내 자존감은 점점 떨어지고 우울감은 더해졌다. 나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시부모님의 직원으로만 살기가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비슷한 시기에 출산을 한 시 동서네는 적극적으로 시부모님의 뜻에 따르고 움직이며 그에 따른 소소한 보상인 손주의 명품 유모차나, 며느리에게 기분 내킨다고 사주는 명품 옷 같은 것들에 매우 만족스러운 리액션을 보이며 만족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 당시 동서가 시어머님에게 얻은 모피 같은 것들을 입고 나타나 나서 너는 왜 그렇게 힘들게 니힘으로 살고 싶어 하니? 어머님 말 잘 들으면 이런 것도 얻는데? 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던 게 떠오른다. 또 가끔 그 당시의 남편을 떠올린다.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나보다 더 현실을 모르는 바보고 준비 안된 아빠였다.
하지만 부모를 상사로 모시는 건 어떤 기분일까? 우리 시부모님처럼 사람을 조종하고 싶어 하고, 남들 앞에서 과시하기 좋아하는 분의 부하 직원으로 사는 건 어려운 일일 것이다. 게다가 아들인 본인뿐 아니라 부인의 고통은 어떠한가? 남편과 결혼을 하는 바람에 그의 부모도 덤으로 얻었고 내 직업도 변하게 되었지만 그 당시의 남편을 돌아보면 그도 힘들었을 것 같다.
손주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나머지 수시로 며느리에게 애기를 데리고 오라는 전화를 하는 어머님. 돌 전 애기 한번 데리고 외출하기가 너무 힘들고 짐이 많으니 보고 싶으면 어머님이 직접 보러 오시라 해도 본인의 스케줄에 따라 본인이 있는 장소로 아기를 데리고 가야만 했다. 지금의 나라면 보고 싶으니 애기를 데리고 몇 시까지 어디로 오라는 전화를 해도 그게 불가능한 이유를 델 힘이 있었을 것인데, 그 무엇보다 내가 내키지 않는 만남은 하지 않을 힘을 가졌을 것인데, 그땐 그게 없었다. 가스라이팅이란 말이 구체화되기 전인 20여 년 전, 나는 타인을 지배하고 교묘하게 조종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피지배자가 그 지배와 조종을 있는 힘을 다해 끊어내거나 관계를 끊어버리지 않는 이상 벗어나기 굉장히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어떻게? 내 시부모이자 내 남편의 상사며 우리 집 경제권을 가지고 있는 시부모를 벗어나지?
무더웠던 7월의 어느 날, 아침 일찍부터 시어머니의 호출로 시댁에 불려 간 날, 여름이지만 아이의 기저귀가방은 줄어들 줄 모르고 점점 커지던 시기, 걸어 다니기 시작하며 저지래를 치는 아이를 어르며 오이소박이를 한 대야 담그고 돌아온 날 밤, 아기를 씻겨재우고 조용한 부엌에서 아직 들어오지 않은 남편을 기다리며 오이소박이가 가득 담긴 김치통을 열어 소박이를 음식 쓰레기 통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