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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을 안 한 변명

부담부증여와 직장인 신용등급

by 언젠가

20여 년 전, 힘들게 출퇴근하기 싫다고, 쥐어짜는 경쟁으로 스트레스받기 싫다고 직장을 나와 결혼을 선택한 나는 지금은 너무나 명확하게 일의 중요성을 안다.


더욱 정확하게는 나의 신용을 증명해 줄 전해 연도 의료보험납입이 증명되는 서류. 저 사람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성실하게 벌어서 세금을 내고 있고 대출을 값을 능력이 되는 사람이니 은행은 저이에게 돈을 빌려줘라 그럼 저이는 꼬박꼬박 이자를 납입하여 은행배를 불려줄 것이다.라는 증명을 받기 위해서는 직장이 필요하다.


아파트를 건지기 위해서는 남편이 이리저리 빌려놓은 높은 금리의 대출금을 제1금융권으로 바꿔서 상환하고 내 이름으로 등기를 이전하는 과정 동안 법무사 사무실을 방문하고 상담하고 하는 일들은 친정엄마가 나서서 도와주셨다. 이 사태의 주원인제공자인 남편은 그 무엇도 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찌그러져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천불이 난다. 그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나는 다시 직장이 필요했다. 연말정산 소득공제 서류가 은행에 들어가야 은행권 주택담보대출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집을 살리기 위해서 친정엄마와 이리저리 방법을 알아보며 법무사 사무소와 은행들을 돌아다닐 동안 남편과 시모는 모르는 척 뒷짐을 쥐고 있었다.



우리가 집을 살 때는 4억이었는데 정확히 2년 뒤에 남편이 우리 집을 여기저기 담보 잡혀서 쓰고 그 원금을 못값아서 대부업체까지 끌어 썼던 돈이 3억 8천. 그 사실을 국민은행에 등기를 들고 가서야 알았다. 기가 막힌 건 남편은 자기가 총 빌려 쓴 돈이 얼마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어떻게 된 일인지 캐묻는데 자기도 모른다로만 대답하고 회피하는 남자와 그런 남자의 엄마로 큰소리치며 며느리와 아들을 쥐락펴락하려고 했던 시모.


급하게 2학기 채용공고를 챙겨보기 시작하여 다시 학교로 들어가서 매일 우는 둘째를 또 어린이집에 던지고 매일 울며 출근하며 앞으로 어찌 되는 것일까? 집을 못 건지면 어쩌지? 생각했던 것처럼 서류진행이 안되거나 대출심사가 막히면 어쩌지? 아니 그것보다 내가 왜 이런 걱정을 하고 있지? 남편이란 작자는 손 놓고 있고 아무것도 안 하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쥐새끼같이 자기 엄마 사업장으로 나가서 저녁에 쥐새끼 같이 돌아와서 지방에 틀어박혀서 말도 안 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는데? 내가 왜 저 인간을 빼놓고 생을 생각하지 않고 나 혼자 해결하고 저 인간을 끌고 살아가려 하는 거지? 하는 질문을 매일매일 했다. 하지만 왜? 에 대한 답을 못 찾았다. 그가 당장 내 일상에서 꺼진다고 그가 망가트려 놓은 내 일상이 당장 단정하게 정리될 것 같지 않았다.


남편이 회피형 인간인 건 사실 신혼 때부터 알았다. 무섭고 강한 엄마밑에서 아무런 결정권 없이 자라난 아들의 특징이라 생각했다. 그는 그의 엄마와 나와의 갈등의 기본 원인을 흔한 고부갈등이라 여겼다. 사실은 그것은 고부갈등이 아닌 인간의 생의 문제이다.



성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자기 인생의 키를 스스로 쥐려고 하는 나는 이미 본인의 인생의 키를 엄마에게 맞긴 남자를 남편으로 선택해 버렸기에 그로 인해 다 큰 성인인 자식과 그가 꾸린 가정까지 관여하며 그들의 인생까지 본인이 좌지우지하려는 어머님과 늘 맞서야 했다.


그건 지금 돌이켜보면 인간의 기본권에 관한 투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의 가족들은 모두 어머님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어머님의 뜻대로 살면서 어머님의 돈을 쓰는 삶을 선택했고 그 편안함을 거부하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남편은 쎈 어머님과 더 부인 사이에서 늘 갈등하고 누구 뒤에 서야 할지를 몰라 방황하다가 내 뒤에 서기로 결심했을 때 그는 직장 상사였던 그의 어머니에게서 해고 통보를 받았다.

나의 시모는, 대책 없는 당신의 아들이자 내 남편이 아파트를 잡혀 먹고, 두 돌 지난 둘째를 새벽같이 어린이 집에 던져놓고 애엄마와 애가 울며 동동거리며 일상을 헤쳐나가는 와중에도 너희들이 어찌 살든 그딴 건 중요치 않아, 다만 그래도 너는 내 며느리니 니 도리는 해야 하니까 명절에 내 집에 들어와서 일은해야 하고 중요한 내 손님들 대접은 해야 해! 그게 싫다면 너 이혼하고 꺼져! 하고 폭언을 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더 이상 그녀의 폭정과 폭언을 참지 않고 내 인생에서 완전히 그녀를 분리하기로 결심하자 그 순간 그동안 그녀 앞에만 서면 사라졌던 용기와 생을 살아갈 힘이 생겨났다.


나의 시모는, 추석에 와서 자기 손님 대접하게 일을 하라고 며느리에게 통보했다 거절당하자, 그날 남편을 해고했다. 해고 통보를 받은 남편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결국 내가 추석에 일하러 들어가기로 하기로 매듭짓고, 다음날 새벽 다시 시모의 식당으로 돌아가서 모르는 척 일을 하기 시작하였지만 그는 나에게 세상에 이런 파리 목숨이 없다. 일용직도 이런 일용직이 없다. 부모 밑에서 일하는데, 고용안정이란 없다. 사장이 기분 나쁘면 하루아침에 잘린다며 하소연했다. 그 사건을 겪으며 나는 임용고사 재도전을 결심했다. 사실 큰아이 어린 시절 애를 키우며 임용에 도전했지만 어린애를 키우며 공부하는 게 너무 어려운 일이라 한번 임용에서 떨어지자 포기했다. 그리고 기간제로도 충분히 좋았고 어차피 일은 똑같으니 어디든 나를 기간제로 써주는 데가 있을 때까지만 일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뒤로 몇 년이 지나서 나는 더 늙었고 이제는 애가 둘인 데다가 기간제로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간절히 이 선별고사에 합격하는 게 중요해졌다. 남편이 고용불안에 시달리는데 나 역시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애들 둘을 키우고 아파트를 지켜내는 게 어려울 것 같으니 내가 합격하는 게 너무나 중요해졌다.


나는 그 사건 이후로 삼 년 동안 주경야독하며 시험에 도전했고 탈모, 스트레스성위염, 공황발작을 얻고 결국 고용안정을 이루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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