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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을 안 한 변명

명절

by 언젠가

그날은 추석 전 주였다. 비가 아주 많이 내렸던 날이다. 사무실에서 시모의 전화를 받았다. 이번 추석에는 손님들이 많이 와서 명절 노동을 해야 하니 전날에 좀 일찍 일하러 오라는 통보였다.


나는 거절했다. 그때는 남편이 몰래 집을 담보 잡혀 대출받아 다 쓰고 경매로 넘어가기 직전인걸 발견했을 때였고 아파트를 살리기 위해 내가 대출을 떠안고 부담부 증여를 받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법무사 사무실을 알아보고 다닐 때였다.


시모에게 당신의 아들이 나 몰래 이만큼의 대출을 받아 다 탕진했는데 집을 살리려면 대출금의 일부를 갚고 내 이름으로 증여받아서 우리가 살며 열심히 또 벌어서 갚겠다 조금만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거절당했을 때였다. 시모는 늘 아들 내외에게 자신의 부를 과장하며 자랑하곤 했다.


그리고 늘 내 말을 잘 듣고 나에게 잘해야 내 돈 물려준다라고 미끼를 걸곤 했다. 하지만 막상 내가 절실할 때는 도움을 주지 않고 나를 모른척했다. 그런데, 시모는 나에게 명절에 시댁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명절 음식을 장만하러 오라는 전화를 한 것이었다.


그동안 전화하고 찾아가면 돈 빌려달라고 할까 봐 나를 피하던 시모. 아직 어린 둘째를 급하게 떼내고 다시 일을 하며 이런저런 서류를 마련하기 위해 법무사 사무실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나의 그간의 사정은 하나도 물어보지 않고 궁금해하지 않고 다만 이번 명절에 귀한 손님이 올 건데 며느리들이 와서 음식을 해서 그들을 대접하며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해야 한다는 목적 하나만으로 나에게 일찍 들어와서 음식 해라는 통보 전화를 한 것이었다.


나는 시모에게 처음으로 명절 노동을 거절했다. 몸도 마음도 너무 지치고 여유가 없어서 이번 명절에 시댁 들어가서 기름 쩐내를 맡으며 전을 뒤집는 노동을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 어머님 올해는 너무 힘들어서 추석에 그냥 쉬기로 했습니다. 어머님의 귀한 손님이 오신다니까 저도 일꾼이 아닌 손님으로 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시모는 전화로 폭언을 퍼부었다. 네가 그렇게 잘나서 명절에 시댁에 와서 일도 안 할 거면 내 아들하고 이혼하고 꺼지라고 소리를 지르며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그녀가 화가 나서 폭발하는 순간들을 본 적이 있는데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의 유령 같은 순간들이었다.


그녀가 나에게 처음 폭발 했던 건 임용고시 공부한다고 큰애를 어린이집에 보낸 걸 들켰을 때였다. 그때 시모는 어미가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 받겠다고 애를 남의 손에 맡기고 공부한다고 설치는 독하고 게으른 여자라고 소리 질렀다. 결국 재취업하는 데로 다시 일하겠다는 내 결심은 꺽지 못했지만, 그 당시에 나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압박했다. 어떤 날은 새벽에 우리 집에 와서 아직 잠이 덜 깬 나를 깨우며 니 공부한다고 내 아들 잘 못 챙겨 먹일 것 같다며 냉장고를 열어보기도 했다.


하루는 새벽에 오셔서 한숨 쉬며 두툼한 갈치를 구워 주셨을 때가 있었다. 새벽같이 시장에 가서 사 오신 거라며 한눈에 봐도 크고 실한 갈치를 굽는다고 내 부엌을 다 뒤지고 다니셨다. 뒤늦게 머리를 긁적이며 깨어난 그녀의 아들놈이 그 갈치를 맛있게 먹는 걸 보고 얼마나 그 뒤통수를 탁 치고 싶었는지. 그런 시절을 참고 보내서 결국 이사를 하고 그녀에게서 벗어난다 느꼈고 드디어 내 인생을 산다 싶었고 내 집도 마련했는데,,,,


그 집을 그녀의 아들인 내 남편 놈이 이년만에 다 까먹었고 본인은 모른 척 도망치고 뒷짐 지고 있을 때 그 사태를 수습하려 친정엄마가 결국 대출금의 일부를 갚아주셔서 겨우 아파트를 건질 수 있었다. 어쩌면 그때 그녀의 주문처럼 그녀의 아들을 반납하고 이혼하고 꺼졌으면 조금 속이 시원했을까?


그해 나는 결국 퉁퉁 부은 눈으로 시댁에 들어가서 전을 부쳤다. 그리고 그녀의 귀한 손님들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남편이 인질로 잡혀서였다. 남편은 시모의 사업장에서 시모의 가게를 물려받는 조건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내가 명절에 일을 하러 안 들어가겠다고 선언을 하자 시모는 남편을 해고해 버렸다. 애 아빠의 복직 조건이 내 노동이라면, 어쩌겠는가? 남편을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았지만 일단은 갈아 마셔도 시모가 해고해 버린 직원이 아닌 내 남편인 상태로 갈아 마셔야겠다는 결심으로 시댁에 노동을 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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