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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류작가 강은영 Nov 01. 2021

나이 든 포도

강원도 시댁에는 포도나무가 있다. 고추 농사를 짓는 하우스 귀퉁이에 심었는데 몇 해 전부터 탐스럽게도 열리고 있다. 덕분에 늦여름부터 초겨울까지 맛있는 머루 포도를 먹을 수 있다. 시어머니가 몰래 설탕을 주입하시지 않았을까? 의심이 들 만큼 달큼한 과즙이 넘쳐흐른다.


주말에 김장을 하러 다녀온 남편이 남은 포도를 모두 따왔다. 그런데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송이마다 끝부분에 달려있는 것들은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건포도인가? 싶을 정도의 모양새인 포도알을 떼어 내면서 80세가 가까워진 노모를 떠올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이 찐다며 관리하시던 분이 요즘엔 많이 드셔도 살이 안 찐단다. "와 부럽다" 하고 말았는데 순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포도는 늦가을이 되면 아래쪽부터 서서히 말라간다. 작아지고 주글주글 주름이 잡힌 모습이 흡사 나이 든 사람의 모습 같다. 마른 포도는 크기가 작고 과즙도 빠져나간 상태이다. 사람이 나이 들어 생기는 주름도 살과 수분이 빠져나간 빈자리라고 할 수 있다.


나이가 들면 영양 불량이 될 수밖에 없는데 노화가 진행되면서 신체적, 생리적 기능이 저하되기 때문이다. 소화 흡수 능력이 떨어지고 치아 상태가 안 좋아지는 데다가 미각, 후각 기능 감퇴에 노년기 우울증, 각종 약물 복용으로 인한 식욕 저하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다. 나이가 들수록 체내 수분 함유량이 점차 감소하는데 갈증 반응이 둔하게 되어 수분 섭취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도 한다.  


80대 이상 노인 중에서 뚱뚱하거나 풍채 좋은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포도가 이제 수명을 다해가니 물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해 쭈글 해진 것처럼 사람도 더 이상 이 세상의 영양분을 먹고살 수 없으니 떠나는 것일까? 삶의 미련 따위 버릴 수 있도록 최대한 작고 가벼운 상태로.  



죽을 때가 되어서야 찰나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는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이 온다면 과연 후회 없이 이 삶이 아름다웠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나와 남편은 언제까지 살다가 갈까? 포도를 먹다 문득 앞에 앉은 남편이 없는 노년을 떠올리고는 눈앞이 울렁이고 목구멍이 아파와 더 이상 먹을 수 없었다.  


포도를 먹다가 웬 청승이람!

하지만 그 청승이 이렇게 또 하나의 글로 탄생했으니 괜찮다. 작가의 삶이란 이런 것 같다. 무얼 하든 생각의 그물망을 치고 그 안에 다 묶어 두고 엮는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생각을 만들어 낸다. 아직은 작고 약한 그물망이 점점 튼튼해지고 커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다 보면 내 세상도 더 깊고 커지겠지. 오늘도 언제 어느 곳에 그물망을 칠 것인가 레이더를 바짝 세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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