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절정이었다. 볕이 제법 따뜻했던 날, 선루프를 연 채 차를 세웠다. 머리 위로는 어두운 하늘이 열려 있었고, 말라 떨어진 나뭇잎들이 앞유리에 얹히듯 천천히 흩날렸다.
차 안은 불 꺼진 오래된 영화관 같았다. 오직 대사만을 주고받기 위해 존재하는 조용한 공간. 시동은 꺼져 있었고, 음악도 없었으며, 말만이 맴돌았다.
몇 차례의 만남을 지나온 밤. 설레기엔 조금 늦고, 익숙하다고 하기엔 아직 이른, 어정쩡한 시기였다.
그는 나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언갈 결심한 사람처럼. 그런데 막상 꺼낸 말은, 너무나도 평범한 이상형 이야기였다.
“쇄골이 반듯한 여자가 좋아요.”
처음엔 그냥 외적인 취향을 말하나 싶었다. 하지만 말투엔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갑자기 떠올라 튀어나온 말이 아니라, 몇 번 삼키다 꺼내는 문장처럼 들렸다. 혹시, 과거 연인에 대한 회상이려나? 아님 그런 얘기를 하자는 건가 싶었지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보고 한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시선과 말의 결이, 묘하게 구체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거 너무 특정됐는데요?”
웃으며 되물었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다만 내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봤다. 말없이도 충분히 말이 되는 순간.
“말투는 느슨한데, 표현은 솔직하고. 헤어지고 나서 생각해 봤는데 그게 참 좋더라고요.”
아, 떠보지도 숨기지도 않는 화법. 이건 과거 회상이 아니라, 내게서 읽어낸 것을 조심스레 말로 옮긴 것이었다. 아직 내면 깊숙이까지 들여다보진 못했지만, 겉으로 드러난 몇 가지 인상만으로도 상대방을 가늠해 보는 단계. 내면보다는 외면으로, 마음보다는 표정의 결로 상대를 읽어내는 시기.
솔직하되 조금은 가벼운 언어들. 하지만 그래서였을까. 오히려 그 가벼움 덕분에, 이 시기에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마음처럼 느껴졌다. 너무 깊지 않기에 가능한 진심도 있으니까. 단순함에, 더 쉽게 마음이 가는···.
조금은 민망해진 탓에, 화제를 돌리듯 물었다.
“목소리는요?”
딱히 궁금했던 건 아니다. 그보다는, 그가 바라보는 대상이 정말 ‘나’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랄까. 말투 얘기에서 이어진 자연스러운 흐름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외모로 시작된 그의 관찰이 어디까지 미쳤는지 알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착각이라면 이쯤에서 빠져나갈 여지도 남겨두고 싶었다.
그는 잠시 침묵한 뒤, 조용히 답했다.
"소리는 바뀔 수도 있잖아요. 그냥, 말에 리듬이 느껴지는 사람. 조금 흐트러져도, 자기만의 박자가 있는 사람.”
이 말까지 듣고 나니, 부정할 수 없었다. 설명 안엔 내가 있었고, 우리가 나누고 있는 대화는 서로의 마음이 어디쯤에 와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식이라는 걸, 그제야 또렷이 느꼈다.
그를 보던 눈길을 거두며 손톱 끝을 들여다보는 척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시선이 자주 바뀌는 사람은 어때요?”
직업 탓인지, 나는 늘 관찰하듯 주변을 본다. 무언가를 응시하고, 곧잘 대상을 바꾸는 습관. 누군가는 나를 산만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싶어 조심스레 건넨 말. 이런 직업이 괜찮은지, 그런 습관이 거슬리진 않을지.
“초점을 자주 잃는 사람이면 좀 위험할 것 같고···. (웃음) 자주 옮기는 사람은 흥미롭죠. 뭘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는 잠깐 침묵을 삼키더니, 경쾌한 톤으로 한 마디를 더 보탰다.
“그게 일인 사람도 있잖아요.”
···.
좋아한다고 하기엔 섣부르고, 좋아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대화. 마음에 다다르기 전의,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흐름. 말보다 눈이 먼저 움직이고, 미세한 반응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밤이었다.
나는 웃으며 답했다.
“관찰력 좋으시네.”
그가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눈치지, 직업병이야 나도.”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테스트 통과 된 거죠?”
조금은 긴장이 풀렸다. 마음을 확인하고 있는 대화라는 걸 알게 되자, 방어보다는 솔직함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반듯한 콧대, 또렷한 턱선, 상냥해 보이는 입꼬리.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간결했고, 대답엔 적당한 침묵을 섞었다. 내용보다 뉘앙스를 더 잘 읽어내는 사람이었다.
“나는 손에 살아온 흔적이 보이는 사람이 좋아요.”
손등의 상처, 손바닥의 굳은살 같은 것들. 그런 걸 보면 마음이 울컥해졌다. 신체 중 손만큼 인생의 시간이 묻어나는 곳도 드물다고 생각해 왔기에.
그는 자신의 손을 지긋이 들여다봤다.
“그래요? 그럼 제 손은 어때 보여요?”
“글쎄, 아직 관찰 중인데. 사연이 없어 보이진 않네요.”
손가락 마디를 스트레칭하며 그는 되물었다.
“그런 사람은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떠오른 건, 오래전 어느 손에 남아 있던 자국들이었다. 세월에 희미해진 흉터와 굳은살, 건조함에 다 트인 피부결. 투박하고 거칠었지만, 그런 손을 오래 보고 있으면 마음이 뭉클해졌다. 말보단 흔적에서 감정이 시작됐던 기억들. 지나간 사람을 떠올리자면, 오히려 이러한 디테일이 대부분이다.
잠깐 머뭇거리더니 그의 시선이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
“입술이 진짜 입술처럼 생긴 거 알아요?”
“칭찬으로 들을게요.(웃음)”
그는 이어 말했다.
“처음 배울 때 그렸던 입술 같아요. 산도 뚜렷하고, 볼륨도 있고···. 흐릿한 점도 매력 있어요.”
조심스럽지만 단정한 말투. 감탄인지, 고백인지 모를 어조가 조금 마음을 흔들었다. ‘매력’이라는 단어는 경계 위에 머물던 내 마음에 선명한 방향을 주었다.
‘그래, 그냥 관찰이 아니라 나를 향한 감정이구나.’ 이 사람과의 관계는 곧 시작될 거라는 예감이 또렷이 밀려왔다.
대답하는 그의 입술을 지나 귀로 시선을 옮겼다. 한때 피어싱을 했던 자국이 옅게 남아 있었다. 취향의 흔적을 조용히 품고 있는 자리. 목 아래로, 어깨로 이어지는 반듯한 선을 눈으로 따라가며 생각했다. 무언가 더 보고 싶은 기분···. 하지만 더는 관찰하지 않기로 했다.
차에서 내리려는 찰나, 그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오늘은 말이 좀 없었어요.”
할 말 다 해놓고 시무룩해진 얼굴이, 마치 외출하는 주인을 아쉬워하는 반려견 같아 귀엽게 느껴졌다.
“없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용기를 모은 듯 입을 열었다.
“맞아요. 그러니까···. 다시 또 보면 좋을 것 같다는 말이에요.”
대화를 끝내기보다 마음을 한 뼘 더 내밀기 위해 남긴 문장···. 나는 문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잠시 망설이다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왕 주차한 김에, 좀 걸을래요?”
어떤 관찰은 고백이 된다. 오히려 더 명확했다. 질문보다 관찰이, 대답보다 리듬이 앞섰고, 꺼낸 말보다 꺼내지 않은 감정은 더 또렷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일은, 결국 말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걸 알아차리는 과정이 아닐까. 조심스레 바라보고, 천천히 느끼며,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들을 음미해 보는 일. 우리가 나눈 건 몇 마디 대사가 아니라, 그날의 공기와 눈빛, 말투와 리듬, 그리고 그 모든 사이에 조용히 흐르던 감정의 결···.
사랑은 늘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결로 시작된다. 굳이 과거를 들추지 않아도, 연애사나 가치관을 미리 검토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흐름이면, 사랑이 시작되어도 이상할 것 없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말보다 먼저 흘러나온 시선과 여백들로, 이미 우리만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