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라는 사람

by 눈부신꽝


친구가 영수증을 만지작거리더니 조용히 접기 시작했다. 별생각 없이 만지던 종이 조각이 어느새 작은 종이배가 되어 테이블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괜히 그 종이배를 똑바로 세워두었다가, 물컵 옆에 조심스레 눕혀 보기도 했다.


그렇게 종이배를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그 사람이 떠오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그 사람이 ‘우리’였던 시절이.


그는 감정이나 관계를 설명할 때면 종종 무언가에 빗대어 말하곤 했다. 처음엔 그게 낯설고 귀엽다고만 생각했는데, 언젠가부터는 그의 말마다 이미지가 붙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진 일을 하는 나로선, 그런 표현이 오히려 그의 마음을 더 섬세하게 짚어볼 수 있는 실마리가 되어주었다. 말이 남긴 심상을 따라가다 보면, 그 안쪽의 결이 또렷하게 다가오곤 했다.



우리가 만나던 초반,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은, 바다도 강도 아니야. 호수야.”


그 말엔 어떤 조심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바다는 파도가 심하잖아. 강은 어디론가 흘러야만 하고. 그런데 호수는, 그저 자리에 조용히 머물러 있어. 깊고 잔잔하게. 흐르지 않아도, 그 자체로 충분하니까.”


그 말을 들은 이후로 한동안 마음이 시끄러웠다. 호수라는 말이 너무 단단하고 조용해서, 괜히 거기에 무언가를 던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늘 어딘가로 향하고 싶어 했고, 무언가를 흔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반면 그는, 그저 조용히 존재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주는 사람이었고.


그 무렵 나는 많은 장면을 그려보곤 했다. 함께 살게 될 집과 그 집에 흐를 음악, 어쩌면 우릴 닮은 아이가 웃는 모습. 내 상상은 늘 미래를 향했고, 때로는 현실보다 더 선명했다. 그는 반대로, 다가올 어느 날보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던 사람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깊어지던 어느 무렵부턴 서로 다른 시간을 걷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밤이었다. 함께 걷다 익숙한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신호등은 아직 붉게 빛나고 있었고, 나는 무심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조용히 나를 끌어안았다. 바람이 약간 차가웠고, 우리는 서로를 안은 채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불이 초록빛으로 바뀌었지만 그가 움직이질 않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신호에 건널까?”


그 말이 왜 그렇게 따뜻하게 들렸는지,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늘 예측 가능한 사람이라 믿었던 그가, 그날만큼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나를 안아준 밤. 그 순간이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을 알아채듯 멈춰준 몸짓. 그 짧고 고요한 멈춤은, 우리가 함께했던 순간들 중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는 정적이었다. 헤어진 후로도, 횡단보도 앞에 설 때면 종종 그 밤이 잔물결처럼 마음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있는 그대로를 조용히 지켜보는 태도. 그 고요한 마음 곁에 머무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자라났다. 맞춰야 한다는 압박이 아니라, 그저 닮아가고 싶다는 마음. 그의 사랑은 내 안의 복잡한 것들을 덮어주었고, 그 안에선 차분히 숨 쉴 수 있었다. 연애라는 걸 하면서 관계 안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았던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괜스레 불안하던 날들도 있었다. 말없이 곁에 있어주는 것으로는, 그 잔잔함만으로는 어쩐지 허전했다. 고요하다는 건 어쩌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나는 그걸 애정의 온도라고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불안에서 비롯된 방황이 관계를 흔들던 순간에도, 그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한결같은 태도로 곁에 머물렀고, 도망치지 않는 사랑이 어떤 건지 보여주었다. 다정하고 조용하게, 말없이 나를 감싸주었다.


파도를 일으키지 않고도 사랑하는 법을 알려준 사람. 그 품이 얼마나 따뜻했는지는,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말없이 머물던 시간들이, 오래 지나 뒤늦게야 온기로 전해졌다.




친구가 접어놓은 종이배를 고이 주머니에 넣어 왔다. 버리기엔 아까웠고, 이유 없이 자꾸 손이 갔다. 나도 가끔, 작은 종이를 보면 무의식으로 꾸깃거리다 종이배를 접는다. 어떤 날은 삐뚤게 접혀 금세 쓰러지고, 또 어떤 날은 너무 얄팍해 물 위에 오래 뜨지 못할 것 같은 작은 배.


종이배를 바라보다 보니, 지난 시절의 나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접히기 전의 종이는 그 자체로도 완결돼 보인다. 매끈한 표면과 뾰족한 모서리, 섣불리 손댔다간 베일 것 같은 날카로움. 하지만 손길에 접히고 겹쳐지는 동안, 그 날카로움은 천천히 누그러진다. 그렇게 형태를 갖춘 종이배는 조심히 띄워보아도 금세 젖고 흔들리고, 방향 없이 떠돌기 일쑤다.


하지만 그는 바다가 아닌 호수였기에, 종이로 만든 배여도 괜찮았다. 깊고 잔잔한 물 위에서라면, 거창한 돛도 단단한 선체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조심히 접힌 채, 곁에 머무를 수 있는 형태면 충분했다.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지만, 그 잔잔한 물 위에서라면 오래 머물 수 있을 것 같았다.



잊고 지낸 건 아니지만, 굳이 찾아볼 만큼 간절하진 않다. 그보다는 가끔, 그가 잘 지내고 있을 거란 상상을 해보는 쪽이 더 마음이 편하다. 지금쯤 그는 어떤 풍경을 바라보며 지낼까. 여전히 호수 같은 마음으로, 곁에 있는 사람을 조용히 품고 있을까. 그리고 그 잔잔한 풍경 속에서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떠오르지도, 가라앉지도 않은 모양이라면, 차라리 좋겠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그가 나를 품어주던 방식처럼 조용히 곁에 머무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말로 다 닿지 않더라도, 고요한 온기를 건네는 방식으로.


나의 사랑은, 호수라는 사람.


아마 그는 모를 것이다. 함께였던 시간이 내 안에 이렇게 오래 남아 있을 줄은. 자신의 말 한마디가 나를 바꿔놓았다는 걸 알게 된다면 아마, 말없이 웃으며 안아줄 사람.


그 깊이를 다시 떠올리며, 조용히 마음을 꺼내 놓는다. 고스란히 담긴 온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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