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면 제일 먼저 하는 일. 버릴 수 없으면 숨긴다. 삭제할 수 있으면 다행이고, 불가능하면 보이지 않게 둔다. 어차피 정리라는 건 타이밍이 오면 저절로 되니까. 그렇게 남은 흔적들을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어떤 건 쉽게 사라지고, 끝까지 남은 것들도 결국 흐려진다. 그러니 당장은 보이지 않는 곳에 밀어 둔다.
이모티콘
카카오톡, 하루에도 몇 번씩 여는 앱이라 위험 요소가 많다. 매일 무심코 지나치지만, 헤어지고 나면 함정투성이인 곳. 특히 연애 중에 깨 볶으려고, 드립 치려고 선물로 주고받은 커플 이모티콘은 최우선 정리 대상이다. 이걸 그대로 두면 어느 날 친구랑 대화하다 무심코 써버리고, 그게 또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숨긴 목록에 들어가 보면 취향이라기엔 좀 민망한, 귀엽고 유치했던 흔적이 모여 있다. 지금 보면 오글거려 몸을 한 번 비틀게 된다. 뭐가 그렇게 좋았나 싶다가도, 지우기 아깝긴 하다. 숨김이라 다행이다.
플레이리스트
함께 듣던 노래들. 이게 은근히 문제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만큼 방대하다. 그냥 지우면 아깝고, 놔두면 감정 기복을 유발하는 무기다. 그런데 해결책은 꽤 간단하다. 재생목록을 하나의 플레이리스트로 묶어 버린다. 제목은 ‘111’, ‘asdf’, ‘그냥’ 같은 의미 없는 나열로. 그런 후 현재 목록을 싹 비우고, 나만의 재생목록을 새롭게 쌓아간다. 어느 날 문득 그 노래를 듣게 되면, 예전처럼 감정이 요동치진 않는다. 익숙해지는 건지, 무뎌지는 건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특별한 의미를 찾지 않게 된다. 물론, 센티한 날 듣다 보면 ‘아, 이거 그때···.’ 하는 순간도 오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걸로 친다. 그렇게 감정을 한 번 걸러내고 나면, 마치 음악 없이도 잘 사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
넷플릭스
이별 후 얄밉게 굴 때가 있다. 알고리즘은 감정을 모른다. 같이 봤던 시리즈, 취향 맞춰주려고 억지로 본 다큐멘터리, ‘시청 중인 콘텐츠’에 떠 있는 애매한 영화들. 전부 다 사라지지 않는다. 시청 기록을 하나씩 지워도, 어디선가 다시 등장한다. 그러다 어느 날, ‘이 작품은 어떠세요?’ 하고 넷플릭스가 과거를 들춰내면, 대책 없어 한숨부터 나온다. 이별 후엔 사람보다 AI가 더 집요하다. 넷플릭스는 나보다 우리를 더 오래 기억한다. 어느 날 ‘당신을 위한 추천’에 연인이 취미 삼아 보던 이상한 다큐가 뜬다거나, ‘다시 보실래요?’라며 우리가 끝내 완주하지 못한 시리즈를 권하기도 한다. 이별했는데도 마무리 못 한 시즌이 더 신경 쓰일 줄이야. 그러면 결국, 이별이 아니라 알고리즘 때문이라도 새 프로필을 만들어 숨긴다.
같이 찍은 사진
사랑을 하면 얼굴빛이 달라진다. 눈빛이 반짝이고, 피부까지 좋아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헤어지고 나서다. 잘 나온 그때의 사진을 단순히 헤어졌다는 이유로 삭제하기엔 억울하다. 그래서 크롭 한다. 때로는 배경까지 싹 정리한다. 원래 그런 사진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남은 레전드 사진이 몇 장 있다. 자세히 보면 허전하지만, 두루 만족스러운 사진들. 적당히 빈 듯한 그것은 '여백의 미학'이라며 합리화를 해본다. 사진을 다루는 건 익숙하다. 흔적을 지우고, 적당히 노출을 조절하면 연애의 기록이 아니라, 그냥 한 장의 사진이 된다. 그렇게 완성된 사진은 SNS에 업로드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 사진 속 빈 공간엔 결국 익숙해진다. ‘누구였는지’보다 ‘나 혼자서도 멋져 보이는지’가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사진집
사진을 업으로 삼다 보니, 선물로 받은 사진집이 많다. 받을 때는 좋았지만, 헤어지고 나면 가장 애매한 물건이 된다. 비싼 책이라 함부로 다룰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연애의 흔적을 그대로 두기도 애매하다. 앞장에 적힌 이니셜과 날짜를 볼 때마다 ‘이건 누구와의 기억이었더라?’ 하고 잠시 멈칫하게 된다. 한때는 이니셜 뒤의 짧은 P.S가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필체로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차마 처리하지 못한 흔적일 뿐이다. 스티커를 붙이자니 사이즈가 맞지 않고, 포스트잇을 덧대면 오히려 더 눈에 띈다. 그렇게 내 책장 한구석엔 ‘앞장을 가린 책’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 추억인지, 애물단지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그런데 가끔 책을 꺼낼 때마다 그런 생각은 한다. 흔적 중 가장 오래 남는 건 결국, 종이 위의 글씨라는 거.
치명적인 것들을 모두 감춘 끝에, 남는 건 그저 오감을 건드리지 않는 비일상적인 것들. 그것들은 닿을 일이 없으니 금세 낯설어지고, 익숙해질 일도 없다.
그러다 어느 순간, 숨긴 것도 남긴 것도 별 의미가 없어지는 날이 온다. 그때쯤이면 자연스럽게 흐려졌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그 정도의 무게였을 뿐이다.
다음 이별에는 괜히 애쓰지 않기로 한다. 그냥 둘 결심, 서둘러 치운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결국 흐려질 테니, 힘을 좀 빼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