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랜드, 어쩌면 스포일러

by 눈부신꽝


뮤지컬 영화는 좋아하지 않았다. 갑자기 노래가 시작되고, 감정이 멜로디로 변하는 순간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기쁨도, 슬픔도, 갈등도 말로 차곡차곡 쌓여야 깊어지는 법인데, 음악은 너무 빠르게 감정을 증폭시킨다.


그는 이미 본 라라랜드를, 이번에는 나와 다시 보고 싶다고 했다. 내가 뮤지컬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나와 또 보고 싶다고 한 건 조금 의외였다. 보고 싶은 영화는 혼자 보는 사람이라, 이미 본 영화를 굳이 같이 보고 싶다고 하는 게 이상하기도 했다.


"좋은 건 몇 번이고 곱씹어야 더 좋아지거든."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결말을 아는 영화를 다시 본다고 감정이 새로워질까.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본다고 해서, 처음과 다른 감상이 생기려나? 일단 그의 뜻을 따라보기로 했지만 신경이 쓰였다. 어쩌면, 그가 말한 ‘곱씹을수록 더 좋아지는 것’이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영화는, 처음 보는데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오히려 묘한 기시감 마저 들었다. 마치 이 영화 속 어딘가에 우리가 있었던 것처럼.


그는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떤 장면들은 한 번만 봐서는 다 알 수 없다는 걸, 같은 장면을 누구와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을 품을 수 있다는 걸. 그래서 함께 보고 싶어 했던 걸까?


알면서도, 또 마주 하고 싶은 결말,

그때 느낀 감정을 내 곁에서 다시 확인해보고 싶은···.


영화가 시작되고, 미아와 세바스찬이 춤을 추며 노래하는 장면들이 펼쳐지는 동안, 그는 자꾸만 내 손을 찾았다. 마치 어떤 감정을 말 대신 전하려는 것처럼, 때때로 꽉 잡았다가 살짝 힘을 주었다가, 그러다 또 가만히 놓았다가. 그 손길이, 영화 속 장면들과 묘하게 겹쳐졌다.


미아가 오디션에서 번번이 떨어지고, 세바스찬이 재즈클럽을 지키기 위해 고집을 피우다가 현실과 부딪히는 장면이 나올때면, 왠지 우리 이야기가 스쳐 갔다. 나는 그 손을 바라보다가, 그의 옆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때 그의 표정은 이상하리만치 담담했는데, 오히려 그 담담함이 더 깊은 감정을 품고 있는 듯 보였다.


사람은, 가끔 미리 아는 것들 앞에서 담담해진다. 마치 언젠가 올 것을 알기에, 미리 준비하는 듯한 표정. 지금은 서로를 이렇게 붙잡고 있었지만, 결국 언젠가는 놓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느낌···.


언젠가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사진, 계속하고 싶은 거 맞잖아. 그냥 지금이 힘든 거 아니야? 이제 와서 다 내려놓고 싶어진 건 아닐 테고.”


질문을 받았을 때, 뭐라고 대답했더라. 그때는 어물쩍 대충 넘겼던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그 질문엔 제대로 된 답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점점 사진 일이 벅차다고 느끼고 있었다. 좋아하는 일이었지만, 마냥 좋지가 않았다. "좋아하는 것"과 "계속하는 것"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반면 그는 확신이 있었다. 사진을 좋아했고, 끝까지 붙잡을 거라고 했다. 더불어 할 줄 아는 건 이거뿐이니까라는 말을 꼭 덧 붙였다.


처음에는 같은 속도로 걷고 있다고 믿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우리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건지도 헷갈렸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길을 모색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는 어찌 됐든 끝까지 가보려는 사람으로 살았다. 뜨뜻미지근한 나에 비해, 일을 대하는 아니 삶을 대하는 그의 온도는 굉장히 높았고 치열했다.


그래도, 이런 달라진 상황 속에서도, “사진”이라는 연결고리는 연애를 이어 갈 수 있게 해주는 느슨한 밧줄 같은 역할을 했다. 서로를 완전히 묶어두지는 않지만, 쉽게 끊어지지도 않는···.





우리는 같은 기종의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내 것, 네 것 구분 없이, 자연스럽게 번갈아 사용했다. 내가 찍던 걸 그가 가져가고, 그가 찍던 걸 내가 건네받고. 그런데도 결과물을 보면, 나는 주로 정물, 그는 사람을 찍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늘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그 차이가 재미있게 느껴지던 때도 있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왜 그렇게 사람을 많이 찍어? 가까운 사이 아니고서야 의미 없지 않아?”

나는 그의 사진을 보며 물었다.


그는 내 사진을 보며 대답했다.

"이런 사소한 것들, 오래 들여다보면 뭐가 달라 보이나? 그냥 사물일 뿐인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이의 대화에는 날이 서기 시작했다.


"적어도 변하진 않거든. 사람은 변하니까."

어느 날은 말을 내뱉고 나서야, 이게 사실은 사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면 네 마음이 좀 편해진다는 거지?”


서로를 바라보던 시선이 살짝 비껴갔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사진에 대한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언제쯤부터였을까. 그의 사진 속 사람들은 내게 낯설게 느껴졌고, 내 사진 속 사물들은 그에게 무의미해졌다.


서로를 찍어야 한다는 강박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같은 장면을 바라보았다는 걸, 같은 순간을 공유했다는 걸, 무엇으로든 남기고 싶었던 것 같다. 아니, 사실은 서로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같은 것을 보며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같은 순간에 머물러 있는 게 맞는지.


우리는 서로의 시선을 이해하려고 했지만 끝내 닿지 못한 채, 결국 헤어졌다.


그 후로, 한동안 그 카메라는 꺼내지 않았다. 찍다 만 필름이 든 카메라는 서랍 속에서 오래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시선이 닿았다. 다 찍고 현상을 안 한 채로 방치한 지 너무 오래되었기에, 더 늦기 전에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스캔이 끝난 데이터를 다운로드만 받아놓은 채 또 확인을 미뤘다가, 어느 날 밤 폴더를 열었다.



첫 사진은 흑백 대비가 강렬한 두 개의 커피잔.
어쩜 이리 다른 속도로 마셨는지 이미 빈 잔과, 가득 찬 잔이 찍혀있었다.

'아, 이건 내가 찍었겠지. '



두 번째 사진은 고개를 떨구고 뭔가를 살펴보는 나.


‘편지를 받았던가? '

어쨌든 그가 찍었을 사진.

마지막 사진에선 흐릿한 뒷모습이 찍혀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라라랜드의 엔딩 장면이 떠오르는···. 웬일인지, 내가 먼저 바삐 자리를 뜨는 뒷모습.



함께 꿈꾸던 순간들은, 그렇게 수십 롤의 필름 속에 남아 있었다. 다만 서로 다른 프레임 속에서 “혼자”의 모습으로만. 각자의 제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과거 속 그는, 좋아하는 것들은 오래 곱씹는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영화도,

좋아하는 음악도,

좋아하는 사람도.


하지만 늘 홀로, 그 경험을, 그 기억을 되새기는 걸 당연시했다. 자신만의 것으로 흡수하는 시간이라며 방해받지 않길 원했다.


그런데 지금 만나는 이 사람은 다르다. 자신이 좋아하는 건 같이 즐기고 싶어 한다. 흠뻑 빠져있는 것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한다.



창가 너머로 햇살이 부드럽게 쏟아지고,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그는 내게 잔을 건네며 물었다.


"넌 왜 이렇게 사물을 많이 찍어?"


나는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질문이었다. 그는 내가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이 감정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과거의 기억이 스며들면서도, 지금의 분위기는 묘하게 다르게 느껴졌다.


"그렇게 묻던 사람이 있었다?···."


그가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천천히 가라앉는 시선이었다. 마치 내 말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고요한 시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나 사람도 많이 찍어. 이젠. "


그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피식 웃었다.


"같이 찍자. 프레임 속에 나도 들어갈래. “


그리고는 핸드폰을 들고 장난스러운 미소로 나를 바라 보았다. 나도 자연스럽게 화면 속에서 그를 마주 했다. 서로를 바라보며 웃던 그 짧은 순간, 그는 셔터를 연속으로 눌렀다.



결말을 알고 있어도, 다시 보면 전혀 다른 감정이 스며드는 영화처럼. 사랑 또한 다시 마주하고, 다시 표현하고, 다시 경험해야 비로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걸 조금씩 깨닫는다.


결국은 같은 장면에 놓일 거라는 걸 알지만, 마음속에 떠오르는 감정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다.


컷, 이렇게 다시 또 사랑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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