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편지}
나아我 선생님께.
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처음엔 단순한 계절의 흐름이라 여겼어요. 하지만 두 번, 세 번 반복되니 우연이라고만 하기 어려웠습니다. 하필 우리가 함께 있는 날마다 눈이 내리는 건, 어쩌면 그 시간이 제 안에 쌓이고 있다는 신호 같았달까요.
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볼 때면, 눈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헤드라이트 불빛 아래 쏟아지는 눈송이들이 짙은 어둠을 가로질러 흩어졌어요. 창문에 닿은 온기와 차가운 바깥공기가 엇갈리면서, 유리창 너머의 풍경이 일렁였습니다. 눈은 흩날리면서도 쌓이고, 녹아도 다시 내렸어요. 차창을 스치는 그 순간들이, 그와 나눈 말들이 조용히 마음에 내려앉았습니다.
그 사람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그 말을 그냥 흘려보냈어요.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말을 하잖아요. 사랑이 허상이라거나, 결국 끝이 정해져 있다거나. 그러니 그 말을 별일 아닌 듯 넘기려 했습니다. 그래야 덜 신경 쓰일 테니까요. 하지만 어떤 말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그때는 몰랐습니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도, 저는 그와 나란히 걷는 일이 좋았습니다.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 조용히 눈이 내리던 순간, 그때의 풍경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이요.
어떤 사람은 사랑을 쉽게 믿고, 쉽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믿는다는 사실조차 조심스러워하고요. 그는 후자에 가까웠어요.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 단순한 부정이었다면, 이해하기 쉬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마치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듯 들렸어요. 나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되뇌는 말 같았거든요.
사랑은 한 사람을 감싸는 일이기도 하고, 한 사람이 만든 경계를 넘지 않는 일이기도 하겠지요. 서로를 바라보지만 결국 서로 다른 세계에 머무는 사람들도 있고,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요. 우리는 서로의 경계를 보면서도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고, 들어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 앞에서 맴돕니다. 사랑이 우리를 보호하는 것인지, 우리를 시험하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나아我,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두 개의 고독이 서로를 보호하며 어우러지는 것"이라고 정의했지요. 저는 그의 고독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이해하려 애쓰면서도, 동시에 제 마음을 지키려 했어요. 그 편이 쉬울 것 같아서. 덜 아프고, 덜 흔들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정리되는 게 아니더군요. 단순히 받아들이고 잊어버리면 끝나는 일이라면, 저는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지 않을 테니까요.
눈은 가볍지만, 쌓이면 풍경을 바꿉니다. 사랑도 그런 것 같아요. 처음에는 가볍게 내려와 어깨를 덮고, 어느새 마음 깊숙이 스며듭니다. 녹아 사라지는 것처럼 보여도, 다시 내리고 또 쌓이지요. 감정이 원래 거기 있었던 것인지, 아주 천천히 내려앉아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알 수 없어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사랑은 시간을 두고 모습을 바꿔가며 우리를 기다린다는 사실이겠죠.
그렇기에 이 마음을 두고 오래 생각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나을지, 한 걸음 더 다가가야 하는 게 나을지···. 하지만 붙잡고 있으면 무거워질 것 같고, 놓아버리면 텅 빈 것 같아 선뜻 방향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감정들은 머무르는 동안 스스로 답을 내리기도 하겠지요. 이 감정도 그런 것이라면, 저는 조금 더 이곳에 서 있어 보려 합니다.
문득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이 감정이 어디로 흐르는지, 어디쯤에서 멈추게 될지 영영 헤아릴 수 없다면, 같은 자리에만 머물게 될까 봐. 그런데 이렇게 글로 옮기고 보니, 아주 희미하게나마 이 마음이 어떤 모양인지 보일 듯도 합니다.
어쩌면 저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이제는 사랑이 움직여주길 바라며 머물러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마음을 열 준비가 되기를,
더는 멈추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오기를,
언젠가 우리의 마음이 마주 보길 염원하는 것.
사랑이란 이렇게 끝이 정해지지 않은 기다림 끝에 찾아오는 걸까요? 아니면 그 지난한 시간 자체가 이미 사랑이 되어버린 걸까요?
그래서 여전히 고민합니다. 이 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그저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것 같으면서도, 멈추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느끼면서요. 가끔은 그의 말 그대로를 믿고 멈추고 싶지만, 그러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습니다. 그날 이후로도 저는 계속 그 말과 그 말 너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떤 감정들은 쉽게 지나가지만, 또 어떤 감정들은 조용히 내려앉아, 시간이 지나도 자리를 지킵니다. 그 하얀 것들이 내릴 때면, 선생님께 이 편지를 보낸 오늘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2024. 12.
신 드림.
{나아의 편지}
신,
당신의 편지를 읽고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마침 눈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내려오는 것들이 천천히 흩어지고, 쌓이고, 녹기를 반복하는 풍경. 어떤 눈은 땅에 닿기도 전에 사라지고, 어떤 눈은 남아 한동안 자리를 차지하지요. 손을 뻗으면 손끝에 닿는 순간 사라지는 것, 기다리면 기다린 만큼 묵묵히 남아 있는 것. 누군가는 그 눈을 바라보며 기꺼이 손을 내밀고, 누군가는 녹고 난 뒤의 흔적을 떠올리며 애초에 닿지 않으려 합니다. 사랑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 당신의 편지를 읽으며, 그 감정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오래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랑은 처음부터 함께 시작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먼저 사랑을 시작하고, 다른 사람은 한참 뒤에야 사랑을 깨닫거나, 끝내 사랑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기도 하지요. 사랑은 단 한순간도 균형을 이루는 감정이 아닙니다. 하지만 신, 사랑이 늘 같은 속도로만 흐르는 것도 아닙니다. 먼저 다가간 사람이 언제나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더디게 깨닫는 사람이 반드시 늦는 것도 아니지요. 서로 다른 속도로 가는 마음이 결국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사랑이 지금 당신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지, 나는 궁금합니다.
오래전 한 사람이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그는 사랑이 너무 강렬해서 자신을 덮어버릴까 봐, 혹은 사랑을 다 믿었다가 결국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먼저 거리를 두는 사람이었어요. 마음이 없는 척, 감정이 없다는 듯 굴면서도, 내가 조금만 멀어지면 누구보다도 먼저 날 찾아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과의 사랑은 늘 안갯속을 걷는 것 같았습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워지지만, 막상 닿고 나면 아무것도 손에 남아 있지 않았어요. 어떤 날은 나를 깊이 사랑하는 것 같다가도, 어떤 날은 아무렇지도 않게 등을 돌리는 사람. 그때는 그 모순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알겠습니다. 그는 사랑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너무 깊이 알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의 끝을, 그것이 언젠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예감하고 있던 사람이었겠지요.
그는 내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너무 가까워지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흐트러져.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어야 오래가는 거야."
그때는 그 말이 참 비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을 흔드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것을 끝까지 지켜낼 용기가 없는 한 사람 때문이라고 여겼거든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경계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 그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더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되고, 기대가 커질수록 실망도 커진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기대를 채워주지 못할까 봐, 결국 서로를 실망시키게 될까 봐. 그러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편이 덜 아프다고,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겠지요.
하지만 신,
우리는 알고 있지요.
부정의 이면에는 늘 갈망이 있다는 것을요.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쩌면 누구보다도 사랑을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도, 사실은 그 마음이 언젠가 닿기를 바라고 있을 거예요.
페르난두 페소아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그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자신을 고립시킨다."
We are, at each moment, what we desire and what we fear.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너무 원하기 때문에, 그 끝이 두려워 더 이상 믿지 않으려 합니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애써 그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마음을 꺼내 보이는 건 또 다른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용기는, 오랜 망설임과 스스로에 대한 질문 끝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냅니다.
신, 당신의 편지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사람은 끝내 닿지 못하는 마음 앞에서도 머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기다림인지, 망설임인지, 혹은 사랑의 또 다른 형태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로요. 사랑이란 서로에게 다가가는 일인 동시에,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문 앞에 서게 됩니다. 어떤 문은 두드리면 열리고, 어떤 문은 시간이 지나도 꿈쩍도 하지 않지요. 하지만 어떤 문은 애초에 열릴 수 있는 문이 아니기도 합니다. 그 앞에서 오래 머물러 있다고 해서, 끝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지금 당신이 서 있는 문이 어떤 문인지, 이미 알고 있지 않나요?
나는 한때, 사랑이란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결국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두렵고 서툰 그 사람도···. 신의 기다림 속에서,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을지 모릅니다. 사랑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부정하는 사람 앞에서도, 감추려는 사람 곁에서도, 사랑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요. 그리고 언젠가 이 사랑이라는 감정이 끝내 우리 안에서 숨길 수 없을 만큼 자라났음을 알아차리게 될 때쯤이면, 자신이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음 또한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상대에게 닿아야만 의미가 있는 감정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저 누군가를 깊이 바라보았다는 사실, 한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싶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랑은 존재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 마음을 외면하지 않는 한, 그것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신이 지금 그 문 앞에 서 있는 이유도, 어쩌면 상대를 향한 감정보다 자신의 마음을 끝까지 바라보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요.
머무는 것과 기다리는 것은 다릅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상대가 다가오기를 바라지만, 머무르는 이는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됩니다. 사랑이 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것인지, 점차 멀어지는 것인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없지요. 하지만 어떤 감정들은 그저 거기에서 오래 숨을 고를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신, 당신의 사랑도 그러한가요?
어떤 감정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지만, 어떤 감정은 선택한다고 흘러가지는 않지요. 무엇이든 결국 당신의 방식대로 흐르고 있을 겁니다. 하얀 눈이 흩날리는 날이면, 문득 당신의 마음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2025. 01.
이 겨울이 지나고도 사라지지 않을 것들을 떠올리며.
나아我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