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마음들은 어디로 가는가

by 눈부신꽝


밤이 깊어지면 늘 불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아침이면 방 안이 조용히 어두워져 있었다. 머리맡의 휴대폰은 충전선에 꽂혀 있었고, 대충 내려놓았던 물컵은 손 닿기 편한 곳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불 끝자락은 내 발을 덮고 있었고,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만이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그게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잠든 사이 불이 꺼져 있었던 게, 휴대폰이 충전돼 있었던 게, 테이블 위 물건들이 정리되어 있던 게.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 왔던 풍경들이 어느 날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그동안 나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을까. 아니면 알아채지 못한 걸까.



어쩌면 사랑도 그렇게 지나가는 게 아닐까 싶었다. 말이 줄어든 순간부터 불안해졌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무심코 하루를 이야기하던 사람이, 이제는 짧게 대답을 끝냈다.


“오늘 어땠어?” 하고 물으면

“그냥.” 같은 단답만 돌아왔다.


그런 순간들이 쌓일 때마다 뒷걸음질 쳤다. 멀어지고 있다는 확신, 아니 그보다는 혼자만 애쓰고 있다는 느낌이 날 옭아맸다. 그런데 이상했다. 말은 줄어든 대신, 다른 것들이 더 선명해졌다.


아침에 냉동실을 열어보니 웬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었다. 처음엔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걸 누가 사 왔었더라?' 한참을 고민하다가 문득, 그날 밤 내가 내뱉은 말을 떠올렸다. 뒤늦게 그를 바라보자, 그는 무심하게 말했다.


“네가 말하길래.” 단 한마디.


말은 그보다 더할 수 없이 짧았지만, 그 말 뒤에 담긴 수많은 감정이 떠올랐다. 피곤했을 텐데도, 대수롭지 않게 나가서 사다 놓은 것. 내가 한 말들을 꽤나 세심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



그러고 보니, 그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 함께 누운 밤이면, 내가 잠든 걸 확인하고 난 후에야 불을 끄고, 창문을 닫고, 베개를 내 머리에 맞춰 놓고, 덜 마른 머리카락을 목 뒤로 넘겨주곤 했다. 어느 날은 무심한 얼굴을 하곤 “추울 것 같아서.”라는 말을 하길래, 순간 울컥했다. 건조한 말투 속에 묻힌 다정함. 말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배려들이 그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말이 줄어든 것과 애정이 줄어든 것이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문득문득 서운함이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끝내 묻고야 말았다.


“혹시 내가 싫어진 거야? 요 근래 말이 너무 없는데. 괜히 이상한 생각 하게 돼.”

목소리가 흔들리는 걸 숨길 수 없었다.


그는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짧게 말했다.

“아니, 그냥. 요즘 너무 피곤해서.”


그냥, 피곤해서.

여느 때처럼 힘을 빼고 던지는 말투.


늘 그래왔던 사람인데도, 나는 그동안 연애란, 연인은, 서로를 향한 태도는 이래야 한다는 틀 속에서만 그를 해석하려 했던 것 같았다. 그를 사랑하면서도 끝까지 의심했다. 말이 줄어들면 사랑도 줄어든 거라고. 어떤 감정은 무조건 선명하게 표현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지금 눈앞의 그는 변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저런 사람이었다.


그러자 문득 웃음이 났다. 그냥 이런 대화 속에서도 저런 답을, 저 온도로 하는 사람. 그러니까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다.


며칠 후, 휴대폰으로 기프티콘이 왔다. 가만히 보니, 그가 예전에 선물해 준 브랜드의 커피 기프티콘이었다. 그런데 무려 10개.


나는 웃으며 문자를 보냈다.

“뭐야 또 보냈어?”


몇 분 후 그의 답장이 왔다.
“너 원래 여기 거 잘 안 마시지?”


“그러니까. 왜 또 이거야?”


“그래도 잘 쓰긴 했잖아.”


그 말에 멈칫했다. 사실 그는 나보다 내 패턴을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별론데”라고 했지만, 사실은 묵묵히 마셨고, 어쩌면 나도 모르게 그 맛에 익숙해졌다. 늘 같은 곳에서 같은 걸 마시는 나를 알고, 그는 아무 말 없이 또 같은 걸 보내온 것이다.


나는 장난스럽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
“뭘 그렇게 계속 같은 걸 보내?”


바로 그의 답장이 왔다.
“그냥, 너네 회사에서 제일 가까운 데라서.”


거기서 피식 웃음이 터졌다. 역시나.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출근길에 커피 하나는 꼭 손에 들고 있어야 하는 나를 잘 아는 사람. 그냥 그걸 알고, 제일 가까운 데니 보냈을 뿐인 사람.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대로 저장을 눌렀다. 웃음이 났다.


“그래. 고마워 “


그 한마디를 내뱉는 순간, 조금 더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모든 게 정리가 되었다. 이 사람은 늘 이런 방식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이제야 겨우 알아차렸다.



예전엔 말로 사랑을 확인해야만 안심이 되었다. “사랑해.” “보고 싶어.” 같은 말들을 듣지 못하면, 사랑이 식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말보다 행동이 더 오래 남는다는 걸 안다. 말수가 줄어든 만큼, 다른 애정의 형태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내가 잠든 사이 방은 어두워지고, 그가 보낸 커피는 아침마다 내 손에 들려 있고, 현관 옆 선반 위엔 밤새 씻어 건조해둔 텀블러가 출근 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언제나 내 곁에서···.


그러니, 혹시 지금 말수가 줄어든 연인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너무 성급히 결론 내리지 않기를 바란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도, 사랑은 조용히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혹은, 당신이 알아차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keyword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