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산책을 하다 지는 노을을 보며 잠깐 걸음을 멈췄다. 나는 이 시간이 제일 좋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디 나라였더라, 어디서는 지금 이렇게 노을이 지는 시간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한대. 엄마는 처음 들어본 말인지 그게 무슨 뜻이냐 물었다. 저 멀리 언덕에 보이는 것이 내가 키우는 개인지 아니면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구분이 안 가는 시간이라고. 그러니까, 밤낮의 경계가 흐려지는 처음이자 마지막 시간. 어디든 도망가도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라 좋아한다고 했더니 엄마는 내게 어디로 도망가게 하고 물었다. 그러게, 어디로 도망가지.
작년 이맘때쯤 나는 많이 아팠다. 드러나는 병이 아니었기에 아무도 몰랐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알아달라 말할 생각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그랬다. 만들기를 하다 커터칼에 손이 베여도, 집에 오다 무릎이 까질 정도로 넘어져도 잘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예민한 성격이면서 참 이상한 데서 무던하다고 엄마는 말했다. 나는 커서도 여전했다. 감기에 심하게 걸려도, 생리통 때문에 혼자 침대를 붙잡고 굴러도 아프다는 말을 잘 안 했다. 엄마는 내게 자주 그랬다. 아프면 아프다 말을 하라고 다 지나가서 혼자 그랬었다 말하지 말고. 그리고 조금이라도 아프면 병원을 좀 가고. 나는 그러면 그때만 그러겠다고 응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면 아프다 말을 하라는 엄마의 말은 곧 너는 네가 힘든 걸 하나도 말하지 않아서 답답하다는 말로 다시 나타났다. 나는 아프다는 말을 딱히 할 생각이 없었다. 아픔은 오로지 내 책임이었다. 내가 그렇게 밖에 살지 못한 것, 그런 생각들로 밤을 지새운 것. 내가 앓고 있는 것을 타인에게 전달함으로써 타인이 함부로 내가 지나온 수많은 새벽을 짐작할까 불쾌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입을 다물었다.
자취를 끝내고 본가에 들어오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내 방에 암막커튼을 다는 일이었다. 밤인지 낮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시간이 필요했다. 작은 테이블과 의자 하나도 두었다. 나는 거기서 글을 쓰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일기를 쓰기도 했다. 책장도 딸려 있었으나 몇몇 읽은 책들은 책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저 테이블에 놓여있었다. 그곳에 있는 건 그곳에 있게 두었다. 단지 그렇게 하고 싶었다. 엄마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것들을 닮아간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이름 때문인지 몰라도 물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방에 불을 끄고 켜놓으면 천장에 물결이 치는 무드등을 사두고 새벽마다 그것을 켜놓곤 했다. 파란 물빛이 들어차면 나는 정말 그 속에 빠진 사람처럼 잠시 숨을 쉬지 않았다가 또 긴 숨을 내뱉었다. 새벽마다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나는 침대 위에 떠 있었다. 한참을 누워있다 실수로 암막커튼을 건드릴 때도 있었는데 가끔은 이미 밝아버린 아침의 시간이 속수무책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깜짝 놀라 다시 재빨리 커튼을 쳤다. 젖어있던 몸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 드는 순간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그 예감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암막커튼을 건드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렇게만 하면 영영 괜찮을 것 같았으므로.
무드등 하나만 켜놓고 어두운 방안에 누워있을 때면 나도 모르게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나 역시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착각. 침대에 누워있는 내 모습이 내가 사랑하던 나인지 나를 죽이려 드는 나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 그런 생각들로 하루를 보내던 때가 있었다.
한 해가 끝나갈 때쯤이었다. 날은 점점 더 추워졌고, 엄마는 날마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보일러를 틀어댔다. 나는 침대에 전기매트가 있어서 굳이 내 방에는 보일러를 틀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공기가 따뜻해야 온몸이 따뜻하다며 엄마는 내게 미련하게 굴지 말라고 말했다. 미련을 둘 게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일주일이 넘도록 보일러를 틀어댔을 때였다. 그날은 무드등도 켜지 않고 혼자 누워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그때쯤의 나는 무언가를 읽지도 쓰지도 못하던 때였기에 잠이 오지 않으면 그저 눈을 뜨고 침을 삼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가 왜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지는 지금도 모를 노릇이다.
새벽 네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내 그 자리에 놓여있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 나는 영수증이며 자잘한 종이 같은 것을 버리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가방 안에는 내가 몇 달 전에 마셨던 몇 장의 스타벅스 영수증과, 빨대를 뜯어냈던 종이, 쓰지 않은 반창고가 들어 있었다. 그러다 어쩐지 책 한 권을 넣어두고 싶어 가방 깊숙이 손을 넣었을 때였다. 물컹하는 느낌과 함께 손에 물기가 느껴지는 바람에 나는 잠깐 놀랐다. 그러나 이내 내 손에 잡힌 건 귤이었다. 잔뜩 곰팡이가 슨 채로, 마지막 단물을 뿜어내고 있는.
나는 그 귤의 형태에 잠시 아득했다. 내가 썩어가는 귤과 함께 한 방에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울었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으나 나는 그날 귤을 손에 쥐고 울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방에 들어있는 달랑 귤 한 개. 누구에게 받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는 뜨거운 바닥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썩어가던 하나의 귤을 떠올렸다. 가방의 속도 엉망이었다. 귤에서 생긴 곰팡이가 녹진하게 천에 눌어붙어 있었다. 그것이 귤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귤을 버린 이후로, 날이 밝아올 때는 암막커튼을 걷게 됐다. 누군가 나를 그 귤처럼, 곪아 터진 나를 방 안에서 발견하고 들어내 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내게 자주 찾아오던 개와 늑대의 시간은 결국 귤의 시간으로 끝이 났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아픈 것을 말하지 않고, 도망가고 싶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외롭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엄마는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내게 한 번 더 물었다. 개랑 늑대, 뭐라고 했지. 아무튼 노을이 지는 걸 보면 사람들은 왜 슬퍼하는 걸까, 그리고 가을이 되면 낙엽은 어떻게 저렇게 빨갛게 물이 드는 걸까. 그 색을 꽁꽁 숨겨 두고 있다가 하필이면 가을에 말이야, 신기하지 않니. 엄마는 그러면서 바닥에 떨어진 낙엽 두 장을 주워서 내게 내밀었다.
사실은 여전히, 산다는 게 내가 살아 있다는 게 내 가방 속에서 썩어가던 귤처럼 무심했다. 나는 엄마가 내민 낙엽을 어쩌지도 못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낙엽에서 그때의 썩어가던 귤의 단물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거기에 망설임 없이 젖고 싶었다. 그런 시간이 있기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