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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an 20. 2021

공업수학을 공부하는 의사

코로나 시대의 일상



손자들을 2주 돌보고 나니 다리를 전다.


한 3년 전에 넘어져서 다리를 다쳤는데, 이게 내 건강의 바로미터가 되었다. 피곤하거나 무리하면 바로 신호가 온다. 그러니 좋기도 나쁘기도 하다. 미리 예측하고 조심할 수 있으니 좋고, 통증을 느끼니 불편하다. 이전의 몸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깨달음은 다친지 참 후  찾아왔다.


통증클리닉에 가서 침을 맞기로 했다. 효과가 별로 없을 때도 있지만, 이전에 좋았을 때가 있어서 이번에도 기대를 가지고 찾아간다. 예약을 하려니 진료 안 하는 시간이 전보다 늘어난 것 같다. 성당에서 알게 된 의사는 나보다 여섯 살 아래이다.


서로 안부를 주고받는다. 오랜만이라 얼굴을 보고 시원스레 말하고 싶지만 마스크를 벗을 수 없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아저씨는 코로나 시대에도 전혀 불편함을 못 느끼죠?

그는 내 남편을 그리 생각한다. 심심하게 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


별 사람 있겠냐며, 다들 비슷하지 않냐고 나는 그에게 되묻는다.

진료 책상 위에 두툼한 책이 펼쳐져 있었다.


-요즘 공업 수학을 공부하고 있어요.

-무슨 자격증 따시게요? 갑자기 왜 수학 공부를?

-그냥이요. 재미있어요. 머리가.

그가 손으로 머리에 원을 그린다.


-머리를 스캔하는 것 같으세요? 막힌데 없이?

-그런 것도 있고, 문제를 푸는 과정이 무척 재미있어요. 침 놓을 때도 배운 수학을 적용하죠.

그가 농담처럼 말한다.


우리 세대는 목적 없는 노력에 익숙하지 않다. 무슨 일을 하든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자격증을 따든, 상을 타든, 눈에 보이는 무엇. 어떤 결과물을 기대하지 않고 노력한다는 건 내게 낯선 일이다.

코로나가 터지기 2 년 전 남편은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했고, 요즘은 기타를 연습한다. 나는 코로나 이후 브런치에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둘 다 좋은 몫을 선택했다. 남편은 정기적으로 음악실에 가서 색소폰을 연습한다. 요즈음 그곳에 들르는 회원은 두세 명이거나 많을 때라고 해봐야 대여섯 명이어서 그나마 다니기에 마음이 덜 불편하다. 남편에게 색소폰과 기타가 없었더라면 이 시기는 무척 힘들었을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다. 십 분 거리에 온갖 책을 빌릴 수 있는 도서관이 있다는 게 무척 감사하다.  




식당에서 만나기가 조심스러워 집에서 음식을 시켜먹기로 하고 몇 달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사회와 단절된 코로나 시기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자신의 취향을 깨닫게 하는 것 같다. 한 친구는 유튜브 방송 듣고, 다른 한 친구는 주식에 빠져 있다. 유튜브 방송을 듣는 친구는 미국 사정을 손바닥 꿰듯 이야기한다. 트럼프와 바이든. 주식을 하는 친구는 그간 수익을 많이 올렸고, 노트 두 권 분량의 글을 썼다 한다. 이과 전공이어서인지 물을 만난 것 같다.

신재생 에너지. 전기차. 수소. 이야기는 직류와 교류 전기 설명으로 이어진다. 회사 이름이 나온다. 코로나 때문에 번성해진 기업과  피해를 입었지만 발전 가능성이 있는 기업. 경제에 문외한인 나도 부러워 슬며시 발끝을 들이민다. 아써라, 친구가 말린다. 소문에 사서 뉴스에 팔아라, 하잖아.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얼굴에 생기가 돌고 빛이 난다.


이전에 자신이 그렇게 사회 이슈에 관심이 많은지 알았을까? 이전에 자신이 주식 관련 온갖 정보에 박사기 될 줄 알았을까?

외부와 단절된 시간이 그들 각자 좋아하는 길을 찾아가게 했다. 그 길 끝에는 목표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앞만 바라보고 달려가는 게 아니라 현재를 바라보는 것. 단순히 과정을 즐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가끔 집에서 술을 마신다. 술 마시는 걸 좋아하지만 술 마시는 분위기는 더 좋아한다. 이전에 둘이서 마시면 소주 한 병을 못 마셨는데 며칠 전엔 거뜬히 한 병을 비웠다. 그 주에는 사흘 연달아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둘이서 마셔봤자 한 컵씩이니,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것 같다.

1, 2차 세계 대전도 겪고, 스페인 독감도 이겨낸 영국의 106세 할머니는 지금도 밤마다 위스키를 홀짝인다지 않는가. 매일 콜라를 마신다는 100세 넘은 일본 할머니 소식도 들었다. 그 영향으로, 콜라 먹고 싶어서 사족을 못 쓰는 여섯 살 손자 녀석에게 콜라 한 컵을 선심 쓰듯 주기도 했다. 녀석은 달라고 보챌 때와 달리 한 번 맛을 보더니 더 달라고 하지 않았다.


술을 마시면 마음에 묻어둔 생각, 옛 기억들이 불쑥불쑥 예기치 않게 올라온다. 분위기가 말랑말랑해져서 그런지. 나는 돌아가신 엄마 이야기를 하고, 남편은 오래전 시골에서 밭일하던 이야기를 꺼낸다. 그때는 몰랐지만, 시간이 흐르면 알게 되는 게 있다. 스치듯 하는 행동이 지나고 보니사랑의 표현이이었다는 것. 어찌 그리 힘들게 살았나, 깨달음인지 트라우마인지 모르는 생각들.


-여름 한낮에 조 밭을 매면 땀이 비 오듯 흐르지. 조밭은 수 천 평인데 머리에 내리쬐는 햇빛은 타는 듯 뜨겁고. 조는 씨를 뿌리고 나면 솎아주고 잡초를 뽑아 줘야 하거든. 제주에는 쌀이 없으니 조를 뿌려. 초겨울에 보리와 조를 심고, 2월이면 보리밭을 밟아줘야 해. 요만큼 보리가 자라면 땅을 꼭꼭 밟아주지.

남편은 손가락을 둥글게 링 모양으로 오므린다. 오 센티 정도벌어지게. 조를 설명할 때는 좀 더 크게 손가락을 벌린다. 내 눈에 십 센티 정도로 보인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이야기 같다.


-식물은 뭐든 옮겨 심어서 새로 뿌리를 내려야 잘 자라. 모질게 키워야 해. 그걸 터득하면서 농부의 수확량이 늘기 시작했지. 벼도 그렇고. 과일나무도 접붙이기를 하지. 귤은 탱자나무에 감은 고욤나무에 접을 붙여.


남편의 말이 이어진다.

-애들 키우는 것도 그래야 해. 모질게 키워야 해.

손자들 이야기로 흘러가면 나는 정신이 번쩍 든다.

거기에 조금 반기를 든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가 "할아버지랑 잘래?" 하니까 애들이 피하잖아. 당신이 아이들을 위해 바깥에서 공차기도 하고, 썰매도 끌어주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다정한 말로 사랑을 자주 표현해야 해. 말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알아주리라, 기대하면 안 돼.

나는 늙어가는 남편이 안타까운 걸까.


-지금이야 애들이 우리를 찾지만 늙으면 다가오지 않을 거야. 우리는 이 시간을 충분히 즐겨야 해.


겉으로 보기에 변화 없는 일상이지만, 우리는 제각기 그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환자가 줄어들어 늘어난 시간에 공업 수학을 공부하는 의사. 유튜브로 폭넓은 세상 소식을 듣는 친구. 주식 공부를 계기로 많은 지식을 얻게 된 친구. 술을 마시며 속 이야기를 나누는 부부. 우리는 각자 취향대로 고요해 보여도 수면 밑에서 끊임없이 ‘다리 젓는 백조’처럼 코로나 시대의 일상을 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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