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작가의 현재 나이로 추정하면 교사들은 지금 몇 살 정도 되었을까? 김 작가의 모교를 찾아가 보면 뭔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려나. 박 형사는 중얼거렸다.
대경 여고 운동장에는 학생들이 뿔뿔이 그늘에 앉아 있었다. 긴 머리, 단발머리, 올려 묶은 머리, 이마 위에 분홍색 찍찍이 헤어 롤러를 붙이고 있는 아이, 머리 모양만큼 생김새도 표정도 제각각이었다. 그늘에 앉아 있던 애들이 낯선 방문객을 불만스런 표정으로 바라봤다.
정말 제멋대로군, 마치 담배라도 꼬나물고 쳐다보는 것 같잖아. 박 형사는 은근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글쎄요. 하도 오래돼서. 어디 있기는 할 텐데.”
물품 보관 창고를 다녀온 서무실 직원은 낡은 앨범을 건네줬다. 박 형사는 앨범을 차근차근 훑어보기 시작했다. 창밖에서 공치는 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가 맑은 하늘에 튀어 올랐다. 즐거워진 모양이네. 박 형사는 그늘에 앉아 있던 아이들의 눈빛이 새삼 떠올랐다.
삼 학년 오 반에 김진영이 있었다. 눈매가 단정했다. 같은 장 맨 아래에 장 효순이 있었다. 사진은 흐릿했지만 다른 사람일 리 없다는 걸 박 형사는 알아챘다. 앨범 앞쪽에 당시 근무한 교사들 사진이 있었다. 다행히 ‘롯의 딸’에 묘사된 선생 이니셜이 평범한 성이 아니어서 바로 찾을 수 있었다. 박 형사는 당시 근무한 교사들의 신상 기록도 가져다 달라고 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직원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서류를 내밀었다.
문경수 물리, 40세.
현경배 국사, 28세.
이호식 한문, 53세.
이십삼 년 전이니, 문경수의 현재 나이는 63세다. 현 경배 51세. 이 호식 76세.
SNS는 교사들의 신상 털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박 형사는 문경수부터 찾아봤다. 그는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후 서울 외곽에서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당시 미혼이던 현경배는 몇 년 후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미술 선생과 결혼했다. 현재는 미국 거주, 최근 한국 입국 기록이 없었다. 이호식은 3년 전 사망했다. 박은 붉은 사인펜으로 이호식의 기록을 그었다.
며칠 후 박 형사는 피해자가 살해당했을 시각에 맞추어 현장을 다시 찾아갔다. 어두운 골목은 섬뜩한 느낌을 줬다. 가로등 불빛이 주변 담장을 푸르게 덮었다. 민원이 들어갔는지 가장자리에 쌓여있던 벽돌은 말끔히 치워지고 없었다. 담벼락에 기댄 채 박 형사는 담배를 한 대 입에 물었다. 골목 끝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루가 멀다고 분주하게 떠들어 대던 기사가 꼬리를 감추기 시작했다. 때맞춰 서해안에서 유조선 침몰 사건이 터졌다. 관심이 그쪽에 쏠렸다.
“천천히 해결해 봐.”
파일을 훑어보던 반장이 고개를 들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박형사에게 말했다.
사건은 박 형사 몫이 되었다. 미결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박은 주변 인물을 폭넓게 조사하기로 마음먹었다.
3
아침부터 짙은 먹구름이 하늘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일요일이지만 무척 바쁜 날이었다. 책이 출판되자 여기저기 오라는 곳이 많아져 일주일에 한 번 가던 교도소 봉사도 한 달째 못 가고 있었다.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 듯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무섭지 않냐고, 물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했다. “거칠고 험상궂지요. 다들 산적처럼 생겼어요.”
농담이다. 사실 그들 대부분은 평범한 외모를 가졌다. 단지, 한순간을 참지 못해 주먹과 칼이 나갔을 뿐.
책을 출판하고 얼마 후 핸드폰에 낯선 번호가 찍혔다. 며칠 간격으로 계속 찍히기에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속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번호, 어떻게 알았어?”
“마음먹으면 뭐든 찾을 수 있어.”
저녁 무렵 집 근처 카페에서 효순을 만나기로 했다. 카페에 들어서니 저만치 앞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며 손을 흔드는 여자가 있었다. 뽀글뽀글한 파마 머리에 체크무늬 면 원피스. 웃으니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기억 속의 그녀는 늘 노랗게 버짐 핀 얼굴인데.
“너는 여전하구나.”
효순이 부러운 듯 나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차를 주문하고 있을 때, 입구 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혹시 김진영 작가님 아니세요?”
여자는 눈이 휘둥그랬다.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럴 때는 유명세도 반갑지 않다.
나는 생각을 감추고 얼른 일어나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었다.
“저, ‘롯의 딸’을 읽었어요.”
순간 맞은편에 앉아 있던 효순의 몸이 움찔했다.
나는 서둘러 감사 표시를 하고 더 중요한 만남이 있다는 은근한 암시로 여자를 돌려보냈다.
“바쁠 텐데, 미안해.”
효순은 여전히 긴장한 표정이었다.
이십 년 세월을 우리는 쉽게 건너지 못했다. 침묵이 돌덩이처럼 우리를 눌렀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하얀 교복을 입은 여학생 서너 명이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그때 참 재미있었지. 기억나니?”
효순이 불쑥 말을 꺼냈을 때 나는 우리 사이에 무슨 좋은 추억이 있냐고 성급하게 물을 뻔했다.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아.”
나도 기억났다. 반 대항 합창 대회.
“노래 제목이 뭐였더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우리는 동시에 제목을 맞추었다.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렸다.
그래, 항상 네가 언니 같았지.
나는 새삼스레 효순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덩달아 즐거워진 나는 합창대회 이야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정작 몇 등을 했는지 우리는 기억하지 못했다. 봄날 오후 교정을 울려 퍼지던 화음과 노랫소리만 기억났다.
인숙이, 명자, 영미, 우리는 동창 이야기를 많이 했다. 주로 내가 이야기했고 효순은 듣기만 했다. 문득 나는 혼자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어떻게 지냈니?”
나의 물음에 풀어졌던 효순의 얼굴이 다시 딱딱해졌다.
“남편은 몇 년 전에⋯⋯ 딸이 하나 있어.”
말이 끊어졌다.
바깥은 이미 캄캄했다. 카페의 노란 불빛이 서둘러 집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비추고 있었다.
“다음에 또 연락할까? 오늘은 좀 피곤하네.”
일어서려 할 때, 돌아서 의자에서 몸을 빼내려 할 때, 효순이 다급하게 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화들짝 놀라 그녀의 팔을 밀어냈다.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당황했다. 내가 다시 자리에 앉자 효순이 책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출간한 시집이랑 수필집을 모두 읽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친구라고 자랑도 했다며.
“이번 책도 좋기는 한데.”
효순은 잠시 머뭇거렸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의 선율이 우리를 감쌌다. 현의 움직임이 급박해졌다. 조바심치는 내 마음처럼. 얼른 말하렴. 하고 싶은 말 꺼내야지.
“꼭, 그 이야기를 써야 했니?”
예기치 않게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화가 불끈 치밀어 올랐다.
그래 그거였지. 나의 예상이 맞았다. ‘롯의 딸’을 쓸 때 마음에 걸렸던 건 오직 한 사람, 그녀였으니까. 마지막까지 책에 넣을까 말까 망설였던 것도 그녀 때문이었다.
“쓸 수밖에 없었어.”
“왜?”
“⋯⋯.”
나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빤히 나를 쳐다보던 효순이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생각이 어디로 빠져나간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녀가 결심한 듯 말을 내뱉었다.
“진영이 네가 내 자리에 앉았을 수도 있었어. 난 단지 운이 나빴을 뿐이야.”
나는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섰다.
(주간 5회 연재 예정)
표지 그림 : 롯과 두 딸, 알브레히트 뒤러(1496-1498), 미국 국립미술관 내셔널 갤러리, 워싱턴 D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