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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Feb 01. 2021

롯의 딸 4

단편 5-4


4

  효순

  봄이면 과수원은 분홍꽃이 하늘을 덮었어. 꽃 속의 세상은 아늑했지. 수확 철이 되면 가족이 모두 나와 복숭아를 상자에 담아야 했어. 복숭아를 담아 봤니? 가능하면 손이 덜 닿게 만져야 해. 금방 표시는 안 나지만, 복숭아는 시간이 지나면 손 닿은 자리부터 상하기 시작하거든. 그러니 복숭아를 살 때는 절대로 만지지 마.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렴.


  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작은 개인 사무실에 취직했어. 참 이상한 게 내게서 어떤 냄새가 나는 걸까? 옮긴 직장마다 나는 일 년을 제대로 다니지 못했어. 내 나이 또래 남자들은 내게 관심이 없었고 항상 나이 많은 사람, 멀쩡하게 부인 있는 남자들이 나를 집적거렸지. 그러니 내가 제대로 풋풋한 사랑 한번 해 봤겠니? 겨우 나 좋다는 남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뤘지. 나를 가려 줄 그늘이 필요했거든. 그 속에 숨어 있을 수 있다면 어떤 남자라도 상관없었어. 남편은 자기 세계에 갇혀 사는 남자였지. 그의 등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지. 그는 왜 나랑 결혼했을까? 


  동창 모임을 한 번도 간 적 없어. 거기를 어떻게 가니? 혹시라도 나를 알아보면 어떡해.      

 “저 애가 걔야, 효순이.” 

 난 너희들 만날까 봐 백화점 문화센터도 가지 않았어. 지난 세월은 철저하게 나를 지우는 시간이었지. 가끔 인터넷으로 동창 카페를 들어가 보긴 했어. 궁금했거든. 너희들 잘살고 있더라. 선생에, 교수에. 직장도 있고, 남편도 있고. 동창 모임에는 있는 애들, 내세울 것 있는 너 같은 애들만 나오더군.


  급히 카페를 나가는 진영을 나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으니까. 인적 드문 골목에 접어들자 나는 진영을 불렀다. 

  “진영아! 김진여엉. 잠깐만.”

  돌아선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계속 따라왔어?”

  “따라오기는. 내가 너 사는 집도 모르고 온 줄 아니?” 

  푸른 등 아래에서도 그녀의 안색이 변하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우리 이야기 아직 안 끝났어.”  

  진영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는 하고 가야지.” 

  “책 때문에? 

  난처한 표정으로 진영이 물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어. 하지만 궁금한 게 있어. 너, 그때 왜 그렇게 말했니?”

  “무, 무슨 말?”

  진영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누구나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나는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컴컴한 밤하늘을 멍하니 올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영의 얼굴이 차츰 흙빛이 됐다.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교실 문밖에서 나는 진영이 친구와 하는 말을 들었다.

  “근데, 쟤 은근히 그걸 즐기는 것 같지 않니?”

  친구의 말에 진영이 귀찮은 듯 큰 소리로 쏘아붙였다. 

  “꼬리를 치니까 그러지.” 

  그날 나는 오후 수업을 들어가지 않았다. 


  “진영이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오랜 시간 나는 내게 물었어.”

  진영은 놀란 것 같았다. 

  “내가 듣고 싶은 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야. 한문 선생보다 너희들.” 

  갑자기 진영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물론 미안하지. 그런데 인제 와서 어떡하라는 거야. 너만 당했다 생각하니? 우린 거의 숨도 쉬지 못했어. 너만 피해자가 아니야. 그 시간을 지울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누구는 기억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니?”

  진영은 화가 나는지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더니 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집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진영의 목덜미를 노려보았다. 

  이대로 보낼 순 없었다. 달려가서 진영의 어깨를 잡았다. 진영이 세차게 뿌리쳤다. 나는 비틀거리다가 골목 가장자리에 쌓인 벽돌 위로 넘어졌다. 갑자기 뒷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엉거주춤 일어나 앉았는데 진영이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갑자기 텔레비전을 끈 것처럼 주위가 캄캄해졌다. 


(주간 5회 연재 예정)


표지 그림 : 롯과 두 딸, 알브레히트 뒤러(1496-1498), 미국 국립미술관 내셔널 갤러리, 워싱턴 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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