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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Apr 28. 2021

구피 키우기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



나처럼 무심한 사람이 키우기 딱 좋은 게 구피다. 아침에 밥만 한번 주면 -그것도 가끔 잊어먹지만 -녀석은 어느새 배가 소복이 불러오고 어느 날 슉슉 꼬리에 추진기를 단 로켓처럼 어항을 헤엄치는 새끼를 낳는다. 어항 아래에 자잘한 돌을 깔고 수초를 넣어주면 녀석들의 분비물은 돌 아래로 들어가고 수초는 비상 양식이 된다. 산소를 공급해주지 않아도, 청소를 해주지 않아도 탁한 물에서 녀석들은 꾸역꾸역 잘만 산다.


열심히 구피를 돌보는 지인은 구피가 새끼를 낳을 때마다 어항을 분리한다. 구피는 갓 낳은 새끼를 호록 호록 잡아먹기 때문이다. 한때 나는 지인의 집이 양어장인 줄 알았다. 베란다에 어항이 대여섯 개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들여다보니 눈과 꼬리만 있는 새끼들이 바글바글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지인은 수초와 구피를 얻으러 왔다. 갑자기 녀석들이 모두 죽었다. 지인과 달리 나는 어항을 분류한 적이 없다. 우리 집 구피는 냉정한 주인 탓에 살아남을 녀석은 살고 도태할 녀석은 도태한다. 나는 그게 자연의 이치거니 한다.


우리 집 수초는 너무 잘 자라 한 번씩 걷어서 버려야 한다. 구피도 잘 자라서 이웃에 분양한 지 벌써 여러 번이다. 나를 잘 아는 지인은 우리 집 구피가 잘 자라는 이유는 단지 어항 때문이라고 한다. 지인의 어항은 재질이 유리이고, 우리 집 어항은 도자기이다.


그럴지 모른다. 아니, 그런 것 같다.

우리 집 어항은 유리 어항과 달리 숨을 쉰다. 그러지 않고서야 한두 달 넘게 물을 갈아주지 않아도, 구피가 흙탕물 속에서 헤엄쳐도 잘 사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지름이 40센티미터, 깊이가 20센티미터 남짓인 도기 어항은 오래전 도자기 공방에서 선생님 도움으로 만든 마지막 작품이다.




아이들이 자라서 모두 집을 떠난 이듬해 나는 집 근처 문화센터에 도자기를 배우러 갔다. 공부한 지 일 년 이상이 된 여자들은 기계물레를, 처음인 나는 손물레를 돌렸다. 둥근 회전판 위에 흙을 올려놓고 부엌 식기나 컵 같은 소품을 만들었는데, 차츰 재미가 들어서 종일 공방에 머물게 됐다. 손 끝으로 계속 흙을 만지니 기운이 달려서 먹을 걸 챙겨가지고 다니면서 흙을 만졌다.


다닌 지 일 년 정도 지났을 때 공방에 변화가 있었다. 소장이 바뀌면서 센터 측에서 도자기 가마를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가마가 없는 공방이라니. 도자기 선생더러 나가라는 뜻 같았다. 그 무렵 나는 다른 일이 생겨서 도자기를 그만두게 되었는데, 선생은 센터의 눈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끗꿋이 수강생들이 만든 초벌 도자기를 건물 아래 주차장에 있는 자동차로 날라 먼 곳의 가마에 가서 구워 왔다.


선생은 삼십 대 후반 아가씨였는데, 그녀를 나는 초벌 도자기 십여 개를 나란히 얹은 2 미터 길이의 송판을 한쪽 어깨에 짊어진 모습으로 기억한다. 가마 앞에서 진득한 땀을 닦으며 담배를 피우다 들켜 계면쩍게 웃던 모습도.


그녀를 보면서 나는 도자기를 굽는 게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처럼 로맨틱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섬세한 예술적인 표현을 떠나 노동의 강도로 보면 도자기 굽는 일은 공사판에서 막일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었다.




사흘간 집을 비우게 됐다. 그럴 경우 구피 밥을 넉넉히 주고 가면 별 탈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어항의 탁한 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두고 가기가 불편했다. 어항은 상당히 무겁다. 이십 킬로그램이 넘는 어항을 끙끙거리며 베란다로 들고나가 씻으면서 나는 언젠가 이걸 깰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항 청소가 이젠 버겁다.


늘 컵으로 구피를 떠서 옆으로 옮기고 어항을 씻는다. 시간이 제법 걸린다. 큰 녀석들은 힘이 좋아 도망가고, 작은 녀석들을 안 보여서 현미경 들여다보듯 뚫어지게 어항 바닥을 눈으로 훑어야 한다. 컵을 갖다 대면 녀석들은 너나없이 내 마음도 모르고 반대쪽으로 죽자 사자 도망간다.

쉽게 청소하는 법이 있다던 말이 생각나 뜰채를 써봤다. 구피를 뜰채로 건져 얼른 새 물에 뜰채를 엎었다. 녀석들은 공중에서 두 번 돌았다. 뜰 때 한 번, 물에 엎을 때 한 번.


충격을 받았는지 어항에 들어간 녀석들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손으로 톡 건드려 보니 움칠 할 뿐이었다. 컵으로 옮길 때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어서 나는 걱정이 됐다. 내일 아침 녀석들이 모두 죽어있는 모습을 보는 게 아닐까? 아무리 쉽고 편해도 다음에는 뜰채를 쓰면 안 됐다. 세월아 네월아 컵으로 떠서 옮겨야 했다.


다음날 아침, 다가가는 인기척에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나는 신이 나서 구피 밥을 세 번, 네 번 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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