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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n 19. 2020

벚꽃 잎이 하얗게 바랜 날

기순 씨는 오늘도 난전으로 출근한다


기순 씨가 김치를 선보이기 시작한 건 올여름부터다. 난전의 작은 대야에 오이김치, 겉절이, 열무김치가 서너 봉지씩 담겨 있는데 아마 팔고 남은 야채를 저녁에 버무려서 갖고 나오는 것 같았다.


“이젠 김치까지 팔아요? 부지런도 하네. 밤에 쉬지도 않나 봐.”


사람들이 타박하듯 말하면 그녀는 슬그머니 웃으며 “놀면 뭐하누.” 작은 소리로 말했다.

새로운 도전 거리가 생겨서인지 기순 씨는 전보다 생기 있어 보였다.  


“갑자기 애들이 내려왔는데, 김치가 똑 떨어졌네.”

“아유, 김치 없으면 안 되죠. 얼른 사가세요. 이래 봬도 이거 내가 정성 들여 담근 거예요. 열무김치도 살짝 젓갈이 들어가야 해요. 나는 항상 좋은 젓갈을 쓰잖아요.”

그녀는 능청맞게 오랫동안 김치를 팔아온 사람처럼 선전도 곧잘 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기순 씨 난전은 다른 가게에 비해 좀 비싼 것 같아도 늘 물건이 좋았으니까.


이십 년 전 아파트가 들어설 때 기순 씨는 상가 앞에 채소 난전을 펼쳤다. 그 날부터 난전은 쉬는 법이 없었다. 급히 슈퍼를 달려가다가도 새파란 대파나 하얗고 통통한 무를 본 사람은 아이고 반가워라, 하며 얼른 방향을 틀어 사 가곤 했다.


기순 씨는 염색한 적 없는 회색 머리에 햇볕에 탄 검은 얼굴로 사시사철 펑퍼짐한 몸빼 바지를 입고 허리에는 전대를 차고 다녔다. 처음에는 멀리서 차를 타고 오는 눈치 더니 언제부턴가 옆 동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바지런한 성품이라 손이 노는 법 없어 어지간한 채소는 모두 다듬어 팔았다. 집에서 채소를 씻다가 꼼꼼하게 뿌리 쪽을 칼로 다듬은 걸 보면 “고맙기도 하지.” 소리가 절로 나왔다.

된장과 잡곡류, 치자 물에 절인 단무지, 도토리묵도 있고, 명절에는 감주도 선보였다. 이런 것들은 주변에서 맡긴 물건들이다. 기순 씨는 난전 가장자리에 이런 물건을 늘어놓고 큰 이문 남기지 않고 팔아주곤 했다.




몇 해 전, 기순 씨 아들이 명문대학에 합격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세상에, 이 집 아들이 그렇게 공부를 잘한다면서요.”

난전 앞에서 사람들이 부러운 듯 말하면 기순 씨는 “그게 뭐 대수라고. 지가 열심히 한 거지.”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흐뭇한 표정을 숨기진 못했다. 한동안 기순 씨 아들 이야기로 아파트가 떠들썩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겉보기에 아파트는 변한 게 없다. 자동차로 십 분 거리에 새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이사 가는 사람, 오는 사람 몇몇이 있었을 뿐. 해마다 다정하게 봄꽃이 폈고, 여름이면 아이스크림을 물고 아이들이 지나갔고, 가을이면 벚나무의 붉은 잎이 도로를 덮었다. 봄같이 따뜻한 겨울이, 귀가 얼얼할 정도로 추운 겨울이 지나갔다.


기순 씨 난전이 문을 닫았다. 무심코 찾아왔다가 난전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도 보였다. 언제 나오려나? 그녀가 보이지 않는 시간은 무척이나 길었다. 동그마니 모아서 비닐로 덮어놓은 난전 살림을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쓸쓸해 “얼른 다시 일어서야죠.” 중얼거리곤 했다.


몇 달이 지났을까. 벚꽃 잎이 땅에 떨어져 하얗게 바랜 날, 기순 씨는 다시 난전을 열었다.


“독한 사람이야. 그러고도 어떻게 일을 해!”

사람들이 수런댔다.



  

딸기를 사러 온 여자 둘이 기순 씨 앞에서 넋두리 중이다. 폭신하게 익어서 손으로 누르면 붉은 기가 묻을 것 같은 딸기가 서너 걸음 떨어져 있는 내게도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애들 키울 때는요, 이렇게 잘생긴 딸기가 한 번도 내 입에 들어온 적이 없어요. 늘 애들 입이 먼저였죠. 이제야 나 먹으려고 이런 딸기 사잖아요.”


옆에 있던 여자가 딸기 사는 친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마 기순 씨도 봤을 거라.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대로다.


“엄마 입도 입이지요. 맛있는 거 아이들만 주지 말고 많이 드셔요.”


딸기를 사 들고 가면서 여자 둘이 실랑이를 한다.


“왜 옆구리 찌르고 그래?”

“너, 모르니? 저 집 이야기.”

“뭐?”

“아들이⋯.”

“왜?”

“아이구야. 너, 저 집 소식 진짜 모르는구나.”


두 여자는 걸어가며 계속 작은 소리로 수군댔다.




다음 날, 깍두기 담을 무를 사려고 난전에 들렀더니, 무가 한 개 천오백 원이었다. 두 개만 사려는데 기순 씨가 떨이라며 네 개를 봉지에 담더니 오천 원만 달라고 했다. 바구니를 드니 묵직해서 어깨가 휘청했다.


“제법 무겁네요.”

“그럼, 돈은 무거운 거야.”

기순 씨가 씩씩하게 말했다.


저만치 앞에 기순 씨가 카트를 끌고 걸어가고 있다. 분홍 보자기에 싼 건 밤새 다듬은 채소일까? 아래 묵직해 보이는 건 김치겠지. 무릎이 시원찮은지 몸이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다리를 전다. 기순 씨는 오늘도 난전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푸른솔문학 202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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