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참 이상한 것 같아.
비가 온다는 거 하나로 핑계를 만들고 싶어져.
어울리지 않은 단어들이잖아.
근데 그게 된다?
비가 와서 거들떠 보지도 않던 책을 읽고
비가 와서맥주만 마시던 사람이 막걸리를 찾고
비가 와서 칼국수를 먹다가 아무렇지 않게 고백하고
넘어져도 비가 와서 그런 거고
무서워도 비가 오니까 누군가를 부른 거고
비가 와서 손을 잡고
비가 와서 섹스를 하고
비가 와서 비싼 돈 들여 근사한 와인바도 가보고
비가 와서 일찍 퇴근하고
비가 와서 집 밖에 한 번도 안 나가고
비가 와서 물이 마시고 싶고
비가 와서 울어보기도 했다가
비가 와서 울면서 웃어보기도 했어.
비가 와서 친구들을 불러 밤새 떠들며 놀았고
비가 와서 아이의 이마에 뽀뽀를 했어.
어린 아이가 비는 좋아하면서 천둥은 무서웠는지 손을 잡더라고
그래서 등을 토닥여줬어. 비가 친구를 데리고 온 거라고.
비가 와서 배달을 시키지 않고 라면을 끓여먹었고
비가 와서 택시를 타지 않고 걸어오면서 웅덩이에 발을 담가봤고
비가 와서 뛰어도 보고
비가 와서 안개도 서리고
비가 와서 한 여름에 입김도 나오고
비가 와서 얼굴에 기름도 덜 생기더라.
비가 와서 머리가 풀리고
비가 와서 앞이 안 보였어.
비가 와서 책을 덮었고
비가 와서 공포영화를 봤어.
비가 와서 누군가 떠올랐고
비가 와서 담배도 껐어.
비가 와서 안 하던 요리도 해보고
비가 와서 화분에 물도 주고
비가 와서 그곳에 찾아갔고
비가 와서 우산을 씌어주고 왔어
비가 와서 로맨스를 만들고
비가 와서 최악도 만들었어.
그래도 다행이야. 비가 와서
초라하지 않았어. 적어도 비가 와서
핑계가 있어서 다행이었어.
비가 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