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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Feb 20. 2023

술 안 좋아하는 사람이 마시는 술

생각해 보면 나는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 사람이다. 여행지에서도 현지 맥주가 있으면 한두 병 마셔볼 뿐 부러 술을 찾는 사람이 아니다. 냉장고에도 요리할 때 쓸 청주 한 병만이 외로이 들어있다. 누가 봐도 논-드링커의 냉장실이다.

 

한 번은 마리아주로 괜찮은 와인을 추천받아 생선 요리 곁들여 먹은 적이 있다. 튀긴 생선 한 입을 먹은 뒤 화이트 와인 한 입을 머금는 순간, 와! 정말 상큼하다! 입안이 깔끔해진다! 요리의 끝맛을 들어 올리는 술이란 건 이런 거구나! 하고 느낀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동일한 경험을 다시는 해 보지 못했고 삶에서 술은 조금씩 멀어져 갔다. 지금도 친구들과 가끔 마시는 소맥을 제외하곤 손님을 초대하거나 하는 특별한 저녁에도 반주할 술을 일부러 준비해 내거나 하진 않는다.


내가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 된 것은 배우자 영향이 크다. 배우자는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이다. 요리사가 되고 싶었으나 여러 이유로 꿈이 좌절된 후 그냥 미식가로 남았다. 혀가 예민한 배우자는 '맛없는 음식'을 참지 못한다. 결혼 초기, 그는 본인의 미식생활에 윤기를 더하려 비싼 위스키를 사서 디캔딩을 하고 잘 어울릴만한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 마셔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욱, 알코올에 훈연향과 캐러멜 향이 섞였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어떤 술도 마시지 다. 결국 그 위스키는 애물단지가 되어 부엌 한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 나이만 들어가고 있다. 가끔 내가 콜라에 타서 마시기는 하지만 혼자 마시는 술은 영 흥이 나지 않는다.

배우자는 실험실 알코올 맛과 향이 나는 소주를 대체 왜 마시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배우자 실험을 많이 하는 직종이라 맨날 그런 냄새를 맡는단다). 술은 혀를 둔하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한다. 태어나서 한 번도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신 적이 없는 이 사람은, 내가 생일날 친구들과 거하게 소맥을 말아 마시고 기어서 집에 들어오는 꼴을 보고 술 마시는 일을 더욱 학을 떼며 싫어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집엔 술이 없다. 술 문화라는 게 없다.


이번에 필리핀 여행 가서 불안을 좀 잊고 싶어서 작정하고 아침 10시부터 산 미구엘 2병을 마셨다. 오후 2시쯤 바에서 해피아워가 열리자 럼이 들어간 칵테일 2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금방은 정신이 어질어질해지며 근심을 잊고 기분이 좋아졌으나, 술을 안 마시던 사람이 연거푸 간에 알코올을 때려 부으니 곧 토기가 올라왔다. 오후 5시, 결국 나는 수영이고 뭐고 침대에 뻗어 메슥거리는 속을 붙들고 굴러다녀야 했다. 배우자의 경멸 섞인 눈초리는 덤.


대학생 때는 한 달 사흘 빼고 매일 술을 마셨는데, 매일같이 정신을 잃었다. 사유는 주량을 모르는 자가 주량이 넘치게 술을 마셔서. 술을 마시면 자제력을 잃는데, 다른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서 어떻게 주량을 조절하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필름도 여러 번 끊겼다. 위험한 일도 여러 번 겪었다. 그럴 때마다 다짐했다. 나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사람이야. 끊자.


그때의 다짐 덕분인지 지금은 자연스럽게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꼭 취할 때까지 달린다. 자제력 획득하지 못한 채로 어른이 된 거다. 애초에 술 마실 수 있는 날이 일 년에 세 번 정도뿐이니, 그날 쯤은 달릴 만도 하다. 애 둘 키우는 양육자로서 밤에 나가 술 마실 수 있는 날은 정말! 아주! 특별한 날이기 때문에.

 일단 밤거리를 다닐 수 있는 자유에 먼저 취하고 술집 특유의 냄새와 분위기에 취하고 친구들과 함께 있다는 기쁨에 취해 벌써 술 석 잔 완샷듯한 상태로 술자리를 시작하게 된다. 그렇게 소맥 한두 잔 말아먹으면 이제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술잔까지 들이킬 기세로 꿀떡꿀떡 들이붓는 거다.


애초에 나에게 술은 맛으로 먹는 음식이라기보단 일탈의 상징에 가깝다. 일상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랄까. 평소의 나는 매사 계획대로 움직여야 하고 뭐 하나라도 실패하면 좌절하고 괴로워하는 그릇 작은 사람인데 술을 마시면 팽팽했던 신경이 조금쯤 누그러진다. 타인과 나 자신에게 관대해진다. 일상의 긴장이 풀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술 안 마시는 사람도 얼마쯤 술자리를 좋아하고 기대하는 것 아닐까.


사실 이번주 목요일에 내 생일 겸 친구들과 만나 술 한잔 하기로 했는데 그 자리가 너무 기대돼서 월요일 아침부터 술에 대한 이야기를 써 봤다. 생일이 제일 빠른 내가 올해의 첫 술자리 스타트를 끊으면 6월에 생일인 벗의 두 번째 술자리를 열심히 기다려서 또 거하게 파티를 벌이고, 마지막으로 11월 생일인 벗의 생일을 챙기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아침 10시에 술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면 결국 나는 술을 즐기고 싶은 사람인지도.


아무튼 목요일이 너무너무너무 기대된다.


아.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지만 그의 문장 중 이것만은 전적으로 동감한다. 맥주는 캔이 아니라 병으로 마셔야 한다. 캔맥주와 병맥주는 아예 다른 종류의 술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맛이 전혀 다르니까.


이번 주 목요일 병맥만 마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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