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오해하고 있었다_(두번째 이야기)
이 글은 제가 2025년 6월 출간한 『내가 나를 오해하고 있었다』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연재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스스로에게 "이 정도는 참아야지"라고 말한 적이 있나요?
나는 그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힘들어도, 억울해도, 화가 나도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삼켰다. 참는 게 성숙한 거라고 믿었고, 감정을 드러내는 건 미숙한 거라고 배웠다.
그렇게 참다 보면 정말 괜찮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괜찮아지지 않았다. 참은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몸 어딘가에 쌓였고, 나도 모르게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이 정도는 참아야지."
나는 이 말로 얼마나 많은 순간을 넘겼는지 모른다.
회의 중 부당한 질책을 들어도, 밤을 새워 준비한 기획안이 한마디로 무시당해도, 팀원의 실수를 내가 뒤집어써야 할 때도 나는 늘 그렇게 말했다.
"뭐, 이 정도야. 참을 수 있어."
그게 프로라고 생각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하게 대처하는 것, 상황을 정리하고 다음 수를 생각하는 것. 그게 리더의 자세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건 프로가 아니었다. 그건 감정을 억압하는 습관이었고, 나를 학대하는 방식이었다.
참는다는 건 감정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다. 감정은 그대로 남아 있다. 다만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표현하지 않은 감정은 썩는다.
썩은 감정은 언젠가 터진다. 그것도 가장 엉뚱한 순간에, 가장 안전한 사람 앞에서.
나는 회사에서는 절대 화를 내지 않았다. 아무리 억울한 상황이 와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집에 오면 달랐다.
아내가 사소한 질문을 하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고, 아이들이 조금만 시끄러워도 "조용히 좀 해!"라고 소리쳤다. 별것 아닌 일에 과도하게 예민해졌다.
아내는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나는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어."
정말 아무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은 이미 '참았기' 때문에 해결됐다고 믿었다. 그런데 왜 집에서는 이렇게 예민해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은 안다. 회사에서 참은 감정이 집에서 터진 거였다. 상사에게 하지 못한 말이 아내에게 향했고, 조직 안에서 삼킨 분노가 아이들 앞에서 쏟아졌다.
가장 안전한 사람들 앞에서, 나는 가장 위험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완벽주의자였다. 정확히 말하면, 완벽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완벽하게 만들어야 했고, 보고서는 단 한 글자의 오타도 용납하지 않았다. 팀원들에게는 "이 정도면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내 일에는 절대 그 기준을 적용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완벽하지 않으면 공격받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작은 실수 하나가 "역시 이 사람은 안 돼" "믿을 수 없어"라는 낙인으로 이어질 거라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나는 늘 120%를 준비했다. 100%로는 부족했다. 예상 질문을 모두 준비하고, 반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 빈틈없는 사람으로 보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거였다.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해도 예상 못한 질문은 나왔고, 아무리 신경 써도 실수는 생겼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를 책망했다. "왜 이것도 생각 못 했어." "이 정도는 했어야지." 타인의 비난보다 내 자책이 더 가혹했다.
팀원이 실수하면 나는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다음엔 조심하면 되죠."
후배가 보고서를 잘못 작성하면 이렇게 반응했다.
"이번엔 이렇게 됐지만,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내가 실수하면 달랐다.
"이런 것도 못 해?" "너 그래서 되겠어?" "다른 사람은 안 그러던데."
나는 타인에게 주는 너그러움을 나에게는 절대 주지 않았다. 타인의 실수는 '과정'이었지만, 나의 실수는 '무능의 증거'였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나는 나 자신을 남들보다 높은 기준으로 평가했다. 리더니까, 책임자니까, 경력이 있으니까 '당연히' 더 잘해야 한다고 믿었다.
둘째, 타인의 실패는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실패는 나의 전부를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나는 나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 나는 기계처럼, 결과만 내놓으면 되는 도구처럼 나를 다뤘다.
나는 내가 기대에 못 미치면 스스로를 벌했다.
성과가 부족하면 더 늦게까지 일했고, 실수를 하면 잠을 줄였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주말도 없이 일했다.
몸이 신호를 보내도 무시했다. "이 정도는 견뎌야지." 두통이 와도, 소화가 안 돼도, 잠을 못 자도 그냥 버텼다. 아프다는 건 나약함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를 벌하면서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노력하고 있어. 나는 게으르지 않아.'
하지만 그건 노력이 아니었다. 그건 자해였다.
나는 나를 채찍질하며 달리게 했고, 쓰러질 때까지 몰아붙였다. 그리고 정말로 쓰러졌을 때,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걸.
어느 날,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일어나려는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팠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말했다. "많이 지치셨네요. 좀 쉬셔야 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화가 났다. '쉬라고? 지금 쉴 상황이야?'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몸이 강제로 나를 멈춰 세웠다.
그렇게 멈춰 서서 돌아보니, 나는 참 잔인한 사람이었다. 타인에게 한 번도 하지 않을 말과 행동을 나에게는 매일 했다.
남들에게는 "힘들면 쉬어도 돼요"라고 말하면서, 나에게는 "이 정도로 힘들어하면 안 돼"라고 다그쳤다.
남들의 실수는 이해했지만, 나의 실수는 용납하지 않았다.
남들에게는 격려했지만, 나에게는 질책했다.
지금도 나는 완벽하게 나를 대하지 못한다. 여전히 가혹할 때가 있고, 감정을 억누를 때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안다.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건 옳지 않다는 걸. 나도 실수할 수 있고, 힘들어할 수 있고, 쉬어야 할 때가 있다는 걸.
나는 나를 벌줄 권리가 없다. 나는 나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걸 배우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
다음 회에서는 '무너지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균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겉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속은 이미 텅 비어 있던 시간들, 그리고 관계의 파탄이 가져온 각성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