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현상과 사건에는 보이지 않는 이면이 있다. 겉으로 드러난 단면만 보고 상황을 해석하면 오해가 생기기 쉽고, 그 오해는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당사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내가 떠올린 생각조차 한 번 더 의심해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야 비로소 상황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
특히 누군가를 질투하는 순간에는 더욱 위험해진다. 질투는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생각을 왜곡한다. 혼자만의 감정으로 끝난다면 그저 스스로를 돌아보면 될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감정이 말이 되고, 소문이 되고, 사실이 아닌 이야기가 마치 진실인 것처럼 부풀려질 수 있다는 점이다. 한 번 퍼진 말은 쉽게 거둬지지 않고, 누군가의 삶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우리가 어릴 적 배운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도 그렇다. 우리는 토끼는 게으르고 거북이는 우직하고 성실해서 결국 거북이가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배웠다. 그러나 애초에 두 존재의 조건이 공정했는지에 대한 질문은 거의 던지지 않는다. 또 토끼가 잠든 사이 거북이가 그대로 지나친 것은 과연 아무 문제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생각해볼 수 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상대의 허점을 이용하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물음이다. 세상에 완벽히 공정한 출발선은 많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또한 공정함을 저버려도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 역시 단면만을 보여준다. 부지런한 개미와 게으른 베짱이라는 구도 속에서 우리는 베짱이를 쉽게 단정한다. 그러나 베짱이의 삶 전체를 들여다본 적은 있는가. 모든 베짱이가 겨울에 굶어 죽거나 구걸하며 살 것이라 단정하는 것은 또 다른 편견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언가를 말하고 판단할 때, 그 배경과 맥락을 함께 살펴야 한다. “이건 무조건 잘못이다”,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다”라는 단정은 이해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변화의 여지마저 없애버린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정말 이것이 사실일까?”라고. 흔히 ‘마녀사냥’이라 불리는 일들을 보면, 시간이 지나 진실이 밝혀진 뒤에야 비로소 왜곡된 판단이 드러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때 격렬하게 비난하던 사람들은 조용히 사라진다. 하지만 이미 날아간 화살은 되돌릴 수 없다. 설령 사실이 아니었다고 밝혀져도 상처는 남고, 그 상처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비난에 동참했던 사람은 죄책감을 느끼거나, 그것을 덮기 위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또 다른 가면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 역시 그런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섣부른 판단을 경계해야 한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려는 노력, 단정하기 전에 한 번 더 묻는 태도, 감정보다 사실을 앞세우는 절제가 필요하다. 이면을 들여다보려는 그 작은 습관이야말로 세상을 조금 더 정확하고, 조금 더 공정하게 바라보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