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시보 1년, 10년을 산듯한 시간

by 오종민

경찰에는 ‘시보(試補)’라는 제도가 있다. 어렵게 시험에 합격해 제복을 입었더라도, 정식 경찰관으로 임용되기 전 1년 동안 현장 업무 능력과 자질을 평가받는 일종의 수습 기간이다. 이 기간에 징계를 받게 되면 경찰의 꿈은 그 자리에서 박살 나고 만다. 그래서 시보 딱지를 단 신임들은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며 숨죽여 1년을 보낸다. 대부분은 선배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무난하게 이 시기를 넘기지만, 나의 시보 생활은 세 번의 거대한 파도 덕분에 결코 순탄치 않았다.


나의 멘탈을 뒤흔든 첫 번째 파도는 '악성 민원인'이었다. 어느 관공서에나 이유 없이 억지를 부리고 전화를 걸어 욕설과 협박을 퍼붓는 이들이 있다. 당시 멋모르던 나는 선배들이 왜 그 번호만 뜨면 슬쩍 자리를 피하는지 알지 못했다. "민원은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는 신임의 불타는 의욕으로 덥석 수화기를 든 것이 화근이었다. 그날부터 그는 나만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경찰청에 고발해 옷을 벗기겠다는 협박이 매일같이 이어졌다.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 선배들은 시선을 회피했고, 며칠 시달리다 보니 다이어트를 할 때보다 살이 더 무섭게 빠져나갔다.


피가 마르던 그때, 내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당시 우리 파출소에는 경찰대 출신의 젊은 소장님이 계셨는데, 그는 말로만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합리적인 리더였다. 사태를 파악한 소장님은 그 악성 민원인의 전화를 직접 가로채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이런 어려운 일은 다 저에게 넘기세요. 소장이 원래 이런 거 바람막이 하라고 있는 자리잖아요.” 순간 그의 등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나는 그날, 훗날 내가 선배가 되면 반드시 저런 리더가 되겠다고 뼛속 깊이 다짐했다.


두 번째 파도는 야간 근무 후 쏟아지는 잠을 깨운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됐다. "검찰청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단 세 글자에 반쯤 감겨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며칠 전 처리했던 사거리 교통사고 건으로 검사실로 출석하라는 통보였다. 당시만 해도 검찰은 경찰에게 묘한 '두려움의 존재'였다. 파출소 순경이 검찰청에 불려 갈 일은 흔치 않았기에, 다음 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검사실 문을 열었다.


수사관의 질문은 황당했다. 며칠 전 무쏘 차량과 택시가 충돌해 무쏘가 뒤집히는 큰 사고가 났는데, 기적적으로 탑승자 두 명 모두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병원 이송을 권했지만 본인들이 한사코 괜찮다며 귀가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수사관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차가 뒤집어졌는데 사람이 안 다쳤다는 게 말이 됩니까? 혹시 뒤로 돈 받은 거 아니에요?" 순간 두려움은 사라지고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신임 순경의 알량한 월급과 명예를 걸고, 그런 파렴치한 짓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억울함에 입술을 깨물며 "당사자들에게 직접 확인해 보시라"고 쏘아붙이고 돌아섰다. 내게 떳떳했기에 굽힐 이유가 없었다. 다행히 그 사건은 내 말대로 아무런 혐의점 없이 내사 종결되었다.


마지막 파도는 내 경찰 인생을 통틀어 가장 아찔하고 서늘했던 순간이었다. 출동했던 현장에서 안타깝게 사람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경남지방경찰청 감찰반의 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 이제 막 배지를 단 시보 순경이 지방청 감찰 조사를 받는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일이었다. 혹여나 초기 대응 미흡으로 징계를 받아 이대로 제복을 벗게 되는 건 아닐까, 밤마다 식은땀을 흘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지옥 같던 시간 끝에 현장 대응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결론이 났고, 나는 비로소 깊은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 외에도 크고 작은 파도들이 몇 번이나 내 목을 조여왔지만, 나는 기어코 쓰러지지 않고 버텨냈다. 내게 시보의 1년은 남들의 10년보다 길고 가혹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시보 딱지를 떼고 정식 경찰관으로 임용되던 날, 나는 형언할 수 없는 해방감 속에서 속으로 통쾌하게 외쳤다. “나보다 시보 생활 빡세게 한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보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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