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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 내 그릇은 내가 만든다

by 오박사

나는 계급 구조로 이루어진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연차에 따라 승진하는 길도 있지만, 더 빠르게 올라갈 수 있는 여러 루트도 존재한다. 나는 입직 초기,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두 번의 승진을 누구보다 빠르게 거쳤다. 하지만 지금은 수많은 후배들이 나를 추월해 앞서가고 있다.


입직 후 10년이 채 되기 전, 나는 큰 갈림길에 섰다. ‘승진’이냐 ‘내가 하고 싶은 일’이냐. 조직 분위기상 승진이 정답처럼 보였지만, 나는 내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 결국 승진을 내려놓기로 했다. 후배들이 나를 제치고 앞서나갈 때 잠깐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내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그 이후로 십수 년 동안 나는 정말 즐겁고 행복하게 일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끔은 승진에 얽매여 살아온 이들이 나를 부러워한다. 그들에게 직장은 전부지만, 나는 직장 밖에도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의 승진에는 애초에 ‘정체’가 예정되어 있었다. 모두가 같은 계급에서 멈춰 섰고, 한정된 자리를 두고 선배와 후배가 엉켜 다투는 모습은 안타깝기까지 하다. 아직도 그들은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서로를 헐뜯으며 경쟁자를 밀어내려 안간힘을 쓴다.


반면, 나처럼 일찍이 승진 욕심을 내려놓은 이들은 조직 밖의 세상에 눈을 돌렸다.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간다. 물론 후배 밑에서 일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걸 인정해버리면 그뿐이다. 자리는 자리일 뿐이다.


누군가는 이것을 ‘승진하지 못한 것에 대한 합리화’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내가 즐겁게 살고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반면, 그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기 위해 눈치싸움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고, 그들의 얼굴엔 피로가 가시지 않는다.


아마 그들은 끝까지 '그릇 싸움'에 목을 맬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그릇에 내 삶을 맞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만의 그릇을 계속 만들어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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