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20살에 공군에 입대해서 평생을 군에 몸 바친 군인이시고 어머닌 가정주부, 그리고 남동생이 한 명 있다. 평범하지 않은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부유한 집안의 막내로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셨다. 군에 하사관으로 들어가서도 승승장구하며 가장 빨리 진급해 세상 두려울 것 없는 분이셨다. 그 당시 아버지들이 비슷했겠지만 엄청 가부장적이고 집안에서 공포의 대상이셨다. 어머닌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아버지와는 성격이 정 반대였다.
아버진 술을 좋아하셨고 술을 드실 때면 어머니와 자주 다투셨다. 말이 다툼이지 거의 일방적으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화를 내거나 가끔 폭력을 행사했다. 아버지가 술을 드실 때면 나와 동생은 겁에 질린 채 방문 뒤에 숨죽이며 싸움이 끝나길 기다렸다. 아버진 무서웠고 성인이 되어서도 쉽게 다가가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버진 우리에게는 많은 것을 해주려고 노력하셨다. 국민학교 때 방학 숙제인 곤충채집도 직접 해주셨고 오토바이에 우리를 태워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좋지 않은 것이 더 많다. 그런 아버지가 장남인 나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그 기대가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아버지의 기대대로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 공부도 잘하길 바랐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사춘기를 제대로 겪지 못했다. 사춘기를 겪어야 할 나이에 착한 아이 코스프레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서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는 맘에 학교 갈 때를 제외하곤 집 밖을 거의 나가지 않았다. 동생은 사춘기가 빨리 왔다. 아버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인지 중학교 때부터 자주 가출을 일삼았고 어머니와 난 그 피해를 감당해야 했다. 어머니는 의지할 곳이 나밖에 없었고 그것이 부담되었지만 내색할 순 없었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나는 계속 착한 아이로 살아야 했다. 솔직히 나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아버진 아직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큰 놈은 정말 착했다. 말썽 한 번 피운 적 없고 늘 내가 말하는 대로 행동했다"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그 말이 너무 듣기 싫다. 내 감정을 숨긴 채 착한 척하는 삶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를 것이다. 화가 나도 표현하지 못하고 혼자 속으로 삭혀야 하는 그 심정을 말이다. 피 끓는 청춘을 그렇게 스스로를 감추고 살았다.
그렇다 보니 나는 그 무엇도 아닌 아버지의 꼭두각시처럼 유년 시절을 보냈다. 공부도 학교도 직장도 모두 아버지의 뜻대로 움직였다. 나는 그렇게 성인이 될 때까지 수동형 아이로 자랐다. 스스로 할 줄 아는 것도 의지도 없었다. 꿈도 미래도 없이 그저 착한 아이면 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