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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민 Oct 19. 2023

35. 12년 만에 후배들 앞에 서다

중앙 경찰학교 강의 의뢰를 받고 매일 후배들을 만나는 장면을 상상했다. 학교가 어떻게 변했을지도 궁금했다. 시간은 참 불공평하다. 필요 없을 땐 그렇게 잘 가던 시간이 간절하게 기다릴 땐 어찌나 느리게 가는지. 그래도 결국 그날은 찾아온다는 것이 다행이랄까. 

     

기다리던 그날이 왔다. 부산에서 충주까지 3시간 20분 정도 걸리기 때문에 9시까지 가기 위해 5시에 출발했다. 중앙경찰학교에 교육받을 땐 늘 버스를 타고 다녀 멀게 느끼지 못했는데 직접 운전해서 가려니 여간 먼 것이 아니었다. 기대감 때문인지 새벽 일찍 나왔는데도 정신이 멀쩡했다. 충주로 향하는 동안 긴장감 때문인지 소변이 자주 마려워 휴게소에 세 번 정도 들렀다. 문경을 지나 조금 더 진행하자 충주 수안보 표지판이 보였다. 학교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학교 정문이 보였다. 옛 추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정문은 변한 것이 없었다. 정문 옆 공터에 잠시 차를 세우고 초코바를 사기 위해 가게로 들어갔다. 강의 때마다 호응이 좋거나 잠깐씩 내는 퀴즈를 맞히는 사람들에게 초코바를 준다.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이 얼마 하지 않는 초코바일지라도 반응이 좋다.        


정문을 지키는 의경에게 신분증을 보여주며 강의하러 왔다고 말했더니 바로 통과시켜 줬다. 본관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잠시 학교 주변을 둘러봤다. 운동장부터 강의동 가는 길 등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넥타이를 고쳐 메고 본관 3층에 위치한 교무과로 찾아갔다. 담당자를 찾아 인사를 나눴는데, 그의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누가 봐도 얼굴에 '나 당신이 강의를 잘할지 걱정돼요'라고 쓰여 있었다. 검증되지 않은 강사인 데다 생각보다 젊어 보였으니(이건 내 생각이다.) 더 불안했을 것이다. 그는 나를 강의장으로 안내했다. 가는 길에 줄지어 걸어가는 후배들을 만났다. 그들은 우리를 향해 ‘충성’이라고 외치며 경례했다. '나도 저랬었는데, 내가 경례를 받는구나' 생각하니 신기하기도 하고 흐뭇했다. 그들에게 가볍게 목례로 답했다.  

      

강의장은 300명 이상이 들어찰 정도로 컸다. 조명도 어두워 잠들기 딱 좋은 분위기였다. 강의 나갈 때면 먼저 강의장 분위기를 체크한다. 조명, 의자 배치, 날씨 등 이러한 것들이 강의 분위기 형성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단 분위기는 상중하 중 하 단계였고, 1개 학급당 50명으로 이뤄진 4개 학급이 한 번에 수강한다고 했다. 더 최악이었다. 결국 강사의 실력이 나머지 부분을 메워야 하는 상황이다. 나도 이 강의장에서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땐 강의장 들어가기 전부터 잘 생각을 했고, 실제로 꾸벅꾸벅 졸았었다. 그만큼 중앙경찰학교 수업 중 잠들기 가장 좋은 공간이 소강당, 대강당이다. '괜찮아,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맘으로 자료를 화면에 띄웠다. 후배들이 하나둘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뒷자리부터 채워져 앞자리가 휑하니 비어버렸다. 상황은 더 나빠지고 있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후배들을 바라봤다. 


수업이 시작되고 학급장이 미리 전달받은 내 이력을 소개하려 했지만, 웃으며 내가 스스로 소개하겠다고 했다. 강사는 자기소개 시간이 중요하다. 얼마나 자신을 재미있게 또는 전문가답게 소개하느냐에 따라 초반 집중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늘 재미있는 소개거리를 준비한다. 당시엔 뭐라고 소개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일단 함성과 박수소리가 들릴 정도로 분위기는 좋았다. 에너지 넘치는 청중을 만나는 것도 강사의 운이다. 그날 내 운은 좋았다. 텐션이 하늘을 찌르는 학급을 만나 말만 하면 호응이 터져 나와 오히려 내가 힘을 얻어 강의도 더 잘 되었던 것 같다. 미리 준비한 초코바 덕분에 강의장 열기는 더 뜨거워졌다. 꼭 군대에서 초코파이에 환장하는 군인들을 보는 것 같았다. 두 시간 동안 그들과 호흡하는 시간은 강사와 청중, 선배와 후배, 동료 그 이상의 끈끈함이 있었다. 마무리 발언을 할 때쯤엔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고 목이 쉬었다. 그들은 그런 나를 위해 열렬한 환호와 박수를 아낌없이 보내줬다. 눈물이 날 뻔한 것을 억지로 참았다. 


페이스북에 올리기 위해 그들과 단체 사진을 찍었다. 마무리한 후 돌아가기 위해 발길을 돌리는데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계속 뒤 돌아봤다. 긴장을 많이 했던지 머리가 아팠고,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집에는 갈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3시간 30분 거리를 오는 길엔 5시간은 걸렸던 것 같다.    

  

강의 평가가 괜찮았는지 다시 의뢰가 들어왔다. 이번엔 담당자 목소리가 좋았다. 나를 추천해 준 친구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아 다행이었다. 대부분 강의는 매끄럽게 진행되었지만, 한 번은 큰 실수를 저질렀다. 강의 도중 졸고 있는 후배, 휴대폰을 보는 후배, 잡담을 나누는 후배가 계속 눈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열심히 듣고 있는 후배들에게 집중했을 텐데 그날따라 좀 예민했던 건지 순간 올라오는 감정을 참지 못했다.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렸다. “선배가 새벽부터 멀리서 달려왔는데 딴짓을 하는 게 후배의 도리가 아니다.”, “현장 나가서 이런 식으로 하면 적응 못 할 거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고, 첫 번째 시간은 어색한 침묵 속에 끝났다. 쉬는 시간에 스스로를 자책했다. '에라이 바보 같은 놈아, 그걸 참지 못하고 그렇게 말하냐?', ‘지가 강의를 잘 못해놓고 청중을 탓하다니’ 강사로서 실격이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2교시 시작하자마자 후배들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제가 흥분을 참지 못하고 부끄러운 행동을 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과한 이후 후배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호응도가 올라갔고 강의는 훨씬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그날 이후로 어떤 강의장을 가더라도 청중들의 태도를 문제 삼지 않는다.      

 

강의 평가는 좋았지만, 경찰관의 SNS사용 자제하자는 분위기로 인해 강의가 줄어들더니 뚝 끊겨버렸다. 그로부터 또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번 중앙경찰학교 강단에 서보고 싶다. 아마 곧 가게 될 것 같은 묘한 끌림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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