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기존 고객을 어항 속의 물고기로 여기죠.”
수년 전, 오랫동안 사용하던 회사의 전화와 인터넷 서비스를 교체한 적이 있다. 당시 영업을 위해 회사를 수차례 방문했던 신규업체 담당자가 타 경쟁업체를 언급하며 내뱉은 이 말이 유난히 기억에 남았던 건 ‘그럼 넌?’이라는 의문이 마음 한켠에서 불쑥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네 일상에서 익숙함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익숙함이 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을 내려놓기가 간단치 않기 때문이리라. 또한 새로운 시도가 가져다줄 결과에 대한 불안감이나 그 과정에 수반될 귀차니즘은 새로움을 거부하고 기존 방식을 유지하는 걸 합리화시킨다. 매너리즘이 활개 치는 이유기도 하다.
최근 자재 구매차 거래하는 업체로 인해 연이어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발생했다. 오랜 시간 믿고 거래를 해오던 업체였지만, 연속해서 실수를 저지르는 데다 대처마저 미흡한 걸 보자니 문득 하이인리의 법칙이 떠올랐다. 첫 시작은 사소한 실수로 이해한다 치더라도 원인 파악과 시정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3 연타석 홈런(?)을 날리지는 않았으리라. 게다가 더 실망스러웠던 점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태도와 경쟁력이었다. 조금 더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하자 타 업체와의 경쟁력이 단숨에 수면 위로 드러났다. 오래된 단골 고객일수록 더 신경을 써서 잘 관리해야 하거늘, 어항 속의 물고기라고 생각하는 순간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다. 이젠 고객이 만만한 호구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고객들은 대단히 현명하다. 온라인으로 업체나 제품 정보를 얻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뿐더러 치열한 경쟁 탓에 몸소 찾아오는 수고를 하는 업체들도 널렸다. 상황이 이런데도 매너리즘에 빠져 스스로 변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업체라면 그 행동이 가져다 줄 결과는 불 보듯 뻔하지 않을까? 사실 고객의 마음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소비자(고객)의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기업은 소비자의 수를 한 명으로 생각하고 개별 소비자에게 고유한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는 고객관계 경영을 실천하지 않는 업체에게서 고객만족을 기대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막상 일을 하다 보면 이게 맘대로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잘 안다. 나는 누군가의 고객이기도 하지만, 나 역시 다양한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지사지'의 자세가 아니라 주관적인 관점에 치우치면 자칫 균형을 잃은 잣대를 들이대게 된다. 수요가 넘쳐날 때는 누구나 풍족할 수 있다. 하지만 공급에 비해 수요가 줄어들면 기준은 더 엄격해지고 조건은 한결 까다로워지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코로나 사태로 일거리가 대폭 줄어든 지금 같은 때에는 션찮거나 미덥지 못한 공급자는 당연히 후순위로 밀리고, 결국 시장에서 도태된다. 세상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게 없는 법인데 우리는 너무 쉽게 그 사실을 잊고 사는 것 같다.
내가 근무하는 회사는 수출과 내수 비율이 약 6:4 비중이다. 핵심 분야가 석유화학 쪽이다 보니 COVID-19의 직격탄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견적 건수가 대폭 줄기도 했지만, 국내외에서 진행 중이거나 예정되어 있던 프로젝트들이 대거 취소 또는 연기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견적과 수주 절벽 상황까지 염려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와중에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다. 드물긴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견적 요청이 해외에서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로 긴급을 요하는 요청들인데, 긴가민가하는 동안 순식간에 발주로까지 이어진다. 추측하기로는 COVID-19으로 해외 제조업체들이 가동이 멈춰진 상황 탓이 아닐까 싶다.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사회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대한민국의 위상을 새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만약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코로나 상황이 안정적으로 바뀌고 예전의 모습으로 다시 복귀했을 때, 그 고객이 다시 우리 회사를 찾을까? 어떻게 해야 할까? 품질, 납기.... 모든 요소가 다 중요하겠지만 '고객의 가치를 가장 중요시하는 파트너'라는 믿음을 심어 주는 게 핵심이 아닐까? 치열한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
적당한 스트레스나 긴장감은 삶의 활력소가 된다.
개인이나 기업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위 ‘청어의 법칙’ 혹은 ‘메기의 법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스스로의 마음속에 메기 한 마리를 풀어놓는 방법도 꽤 괜찮은 해법이 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