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동안 그들이 정말 바쁜 줄로만 알았다.
연락이 뜸했고, 만남도 드물었고, 답장도 느렸다. 그래도 가끔 연락이 오면 반가웠다. 바쁜 사람이 시간을 냈다는 게 오히려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들의 드문 연락을 애써 의미 있게 받아들였다.
안부와 부탁 사이
오래 알고 지낸 선배가 있었다. 몇 달에 한 번씩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처음에는 그냥 안부 인사차 연락한 줄 알았다.
“요즘 어떻게 지내?”
반가워서 잘 지낸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대화가 어느 정도 무르익으니 슬쩍 본론이 나왔다.
“아, 그리고 혹시 말이야.”
처음 한두 번은 우연인 줄 알았다. 세 번째쯤 됐을 때 알았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 인사가 아니라 워밍업이었다. 본론을 꺼내기 전에 분위기를 데우는 과정이었다.
선배는 절대 용건이 없는 상태에서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한 번은 내가 먼저 연락했다. 밥이나 한번 먹자고. 선배는 말했다.
“요즘 너무 바빠서. 다음에 보자.”
그리고 네 달 뒤,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부탁이 있다고.
다정함의 농도
그들의 다정함에는 이상한 특징이 있었다. 농도가 필요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부탁이 클수록 그들은 더 다정했다. 연락 주기도 짧아졌고, 말도 따뜻해졌고, 밥도 샀다. 그 시기에는 진짜 가까운 사이가 된 것 같았다. 이 사람이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런데 부탁받은 일을 해결하고 나면 다정함의 농도는 급격히 옅어졌다. 연락이 뜸해지고, 답장이 느려지고, 어느새 또 몇 달이 지나 있었다.
한 번은 아는 대표님의 부탁을 들어줬다. 그러자 바로 다음 날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정말 고마워.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그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진심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그다음 연락은 두 달 뒤에나 왔다.
사실 그의 다정함이 진심인 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정함에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호출은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 아니다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직장 동료가 있었다.
같은 팀에 있을 때 우리는 꽤 친하게 지냈다. 밥도 자주 먹었고, 퇴근 후에도 가끔 봤다. 그런데 내가 팀을 옮기고 나서 연락이 뚝 끊겼다. 처음에는 서로 바빠서 그런 줄 알았다.
6개월쯤 지나자 그녀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다.
“야,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반가웠다.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본론이 나왔다. 내가 옮긴 팀과 관련된 부탁이었다. 내부 사정을 좀 알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계산을 해봤다. 6개월. 같은 회사 안에 있었는데도 6개월 동안 연락이 없다가, 내가 팀을 옮긴 후에야 연락이 왔다.
우연치고는 타이밍이 너무 좋았다.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과 관계를 호출하는 사람은 다르다.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특별한 용건이 없을 때도 연락을 하지만, 관계를 호출하는 사람은 부탁이 생겼을 때만 연락을 취한다.
왜 얌체가 될까
필요할 때만 다정한 사람들은 대개 본인이 그런 사람인지 모른다. 바쁘게 살다 보면 연락이 뜸해지는 건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 생겼을 때 연락하게 되는 것도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관계를 유지하는 데 에너지가 많이 든다는 걸 알기 때문에, 필요할 때만 쓰는 게 효율적이라 느끼는 것이다.
나는 꽤 오랜 시간 참아주었다. 바쁜 시기가 지나면 달라지겠지, 이번 일만 끝나면 자주 보겠지 싶었다. 그런데 바쁜 시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나한테 부탁할 일이 한동안 생기지 않았을 뿐이었다.
기다리는 내내 나는 그 관계에 에너지를 쓰고 있었다. 상대는 필요할 때만 나타났는데, 나는 기다리는 시간 동안에도 그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연락의 빈도 대신 맥락을 본다.
항상 용건과 함께 나타나는 사람, 내가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때만 다정해지는 사람, 부탁을 들어주면 다정함의 농도가 옅어지는 사람.
그들이 나쁜 사람이라서 멀리하는 게 아니다. 그 관계에서 내가 어떤 역할인지를 알게 되자, 더 이상 그 역할을 하고 싶지 않아 졌을 뿐이다.
나에게 관계는 필요할 때만 꺼내 쓰는 물건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에게 관계는 정확히 그런 것이다. 필요할 때 꺼내고, 필요 없을 때 넣어두는 것.
그리고 그 서랍 안에 있는 동안, 나는 내가 서랍 속에 들어가 있는 줄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