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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Feb 17. 2021

[#연재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08

퇴근길을 돌려다오 03

심서방네 아버지와의 통화는 끝났다.

그러나, 매일 아침 아이 등교 시각 및 현황 보고는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심 서방이 지각을 하고 말았다. 편의점 절도 건으로 출석정지 중이던 심 서방이 여친과 출석정지 기간이 겹쳐서 둘이 강원도로 놀러 갔다. 그런데 여친 출석정지 기간이 하루 더 늦게 시작해서 늦게 끝났다. 의리가 있지, 여친 혼자 놀게 할 순 없었다. 그래서 같이 강원도에서 하루 더 놀았다. 그리고 이른 점심을 먹고 열심히 달려왔는데 이 시간이라고 했다. 학교를 다니자는 건지, 결혼을 하자는 건지. 심서방네 며느리도 관리를 같이 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할 뻔했다. 어머, 나 좀 봐, 이제 내가 심 서방 엄마가 다 됐네.



그렇다, 이거지. 여친을 위해 무단지각을 하셨다고요.

심 서방에게 통하는 수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러자 심 서방이 손사래를 쳤다. 여친 손대면 날 죽이겠다고 했다. 그런 협박쯤이야 이젠 뉘 집 개가 짖는 소리로밖에 안 들린다.

"엄마 전화번호는 아빠한테 물어볼까?"

곧장 욕설과 함께 뒷주머니에서 전화기가 나왔다. 저장된 번호를 찾아보며 알려준다. 사실 번호가 기억도 안 난다며. 폰에는 ATM이라고 저장이 되어 있다.

"장난치지 말고 엄마 번호!"

이게 엄마 번호 맞단다. 무슨 엄마가 ATM으로 저장되어 있냐고.

"돈 뽑는 기계냐?"

"네. 맞아요. 이렇게 사고 치고 전화하면 카드도 정지시켜요. 이제 당분간 돈 못 얻어 쓰게 생겼네. 내가 쌤 때매 되는 일이 없다니까요."



이 집안 돌아가는 꼴 좀 보소.

"아버지는 뭐라고 저장되어 있니?"

정색하는 내가 오히려 우스웠는지, 갑자기 헤벌쭉 웃으며 보여준 아버지 닉네임은 '집'. 아빠가 그냥 집이다.

왜냐하면 아빠가 어디로 가시든 나는 아빠랑 살 거니까.

"그렇구나. 왜?"

"아빠는 날 좀 포기했거든요. 엄마는 진짜 지겨워요. 아빠는 졸업하면 아무 데라도 독립시켜준대요. 엄마는 나 졸업하면 낚아채서 엄마 건축사무실에 끌고 가서 일 가르칠 거래요. 나는 그렇게는 못 살아. 엄마 전화해서 뭐라고 하시게요? 이럴수록 우리 집안은 더 콩가루 돼요, 쌤. 그렇다고 내가 출석정지 먹은 마누라를 어떻게 혼자 두고 옵니까? 앞으로 잘할게요. 전화하지 마요, 좀. 네?"

"심 서방, 넌 여친이 그렇게 좋니?"

"네. 결혼할 거예요. 졸업하자마자 하기로 했어요."

"미리 축하할게. 근데 너네 세대에, 아빠가 중졸인 건 좀 슬프지 않니?"

"아, 왜요, 왜 중졸이에요? 나 고졸할 건데."

"네가 잘해야 여친도 잘 따라오지. 네가 학교 빠지고 건성으로 다니다가 사고 쳐서 학교 그만두면 마누라는 철 들어서 여보 난 고졸할게, 할 것 같니? 애가 나중에 왜 우리 엄마 아빠는 다 중졸이야? 나도 그래도 돼? 하면, 그래, 학교 다녀보니까 별 것 없더라, 의무교육까지만 하자, 그럴래?"

"아, 쌤. 사고 안 쳐요. 누가 학교 그만둔대요?'

"뭐야, 편의점 절도 정도는 사고도 아니라 거야? 오늘은 또 뭐야? 뭘 믿고 무단 지각이야? 폰이나 내놔."

"싫어요. 여친 혼자 있는데, 폰 없으면 연락도 못 하고. 오늘만 봐줘요, 쌤."

아아, 마음 같아선 여친에게 퀵 서비스로 딱 보내버리고 싶다. 제발 좀 데려가라고. 마마보이가 아니라 여친보이, 17세의 정열이 이런 거였나? 생각해보면 성춘향 방년 16세, 이몽룡 17세. 로미오는 정확하지 않지만 줄리엣은 만 14세가 채 되지 않은 나이. 그렇구나. 호르몬이 가장 설치는 나이가 이 무렵이구나. 인생을 거는 나이,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성은 없는 거니?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ATM님의 목소리

여성이지만 상당히 낮고 굵은 음성, 딱 떨어지는 절제된 문장, 다소 톤이 높고 수다스러운 아버지와는 달랐다.  듣기만 해도 심 서방이 왜 저러는지 알 것 같다.

"뜻밖이군요. 학교라니. 무슨 일이시죠?"

"아, 네. 어머니와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어서요."

"애 아빠랑 얘기하시면 될 텐데요."

"아버지도 바쁘시고, 또 어머니랑은 그동안 연락 못 드리고 해서요."

"학교에서 또 사고 쳤나요?"

"아, 어머니께서 잘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그간 편의점 절도 사건, 출석정지, 오늘의 무단 지각, 아 얘기해버릴 뻔했으나, 집안에서 공유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잠시 머뭇거렸다.

"아이가 문제가 있었다면, 아량 없이 처벌해주시기 바랍니다. 경우에 따라 퇴학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들 하나를 너무 오냐오냐 키웠어요.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거짓말도 밥 먹듯이 하고, 어른 알기를 개똥으로 아는 놈입니다. 선생님도 겪으시면 아시겠지만, 자비는 아이를 더 망칠 겁니다. 학교도 다시 들어가고 싶어서 피눈물이 나봐야 정신 차리죠.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강력하게 처벌해주시고, 빨리 자기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밖의 절차나 필요한 상황들은 다 애 아빠와 상의하시면 됩니다."



이건 부모야, 상사야?

아이에 대한 모든 대화가 다 업무에 관한 회의 같았다.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고, 심지어 분노조차도 없는 건조체 문장들, 받아 적어서 구기면 낙엽 소리가 날 것 같은. 괜히 전화했나? 부모들이 다 나 몰라라 하면, 어쩌라고, 그러니까 마누라만 찾지, 에잇. 자기 자식 일에도 평정심 넘치는 상대방에 비해, 나는 남의 자식 일에 지나치게 감정이 용솟음친다.

"어머니, 잘 알겠습니다. 어머니 불편하지 않게 아버지랑 잘 진행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혹시 아이랑 종종 통화도 하고 그러시나요? 서로 떨어져 계신다고 들었는데."

"...... 그 새끼가 제 전화를 안 받아요. 매일 전화해요, 제가. 미친 새끼. 내가 지 엄만데. 전화를 안 받아요. 하아."

어머나, 건조체 문장에 물기가 스며들어 수화기 너머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선생님, 제가 이러고 삽니다. 돈 없을 때만 전화가 와요. 문자만 딸랑 남기면 돈 안 부쳐주고요. 그나마 목소리라도 한번 들어야 돈을 보내줍니다. 아빠가 넉넉하게 주는지, 그나마도 1년에 몇 번 안 돼요. 혹시나 굶을까 봐 통장 확인은 제가 매일 하거든요. 그놈 돈 마른날이 나는 목소리라도 듣는 날이에요."

"어머니, 몰랐습니다. 그러셨군요. 애가 하도 엄마를 무서워해서, 떨어져 지내서 그런 건가, 서로 자주 안부라도 묻고 지내는지, 서로 소통이 안 되면 아이도 상처를 받으니까, 궁금해서 여쭤본 거였는데. 너무 속상하시겠어요."

"선생님, 제가 무슨 얘기를 하든 그놈은 들은 척도 안 해요. 학교 잘 졸업할 수 있도록 잔소리도 많이 해주시고, 잘 좀 붙들어주세요. 아빠가 케어한다고 해도 다들 바빠서 쉽지 않을 겁니다. 잘 부탁드려요."



엄마는 아빠에게, 아빠는 담임인 나에게, 관심과 책임을 떠넘긴다.

엄마는 통장 잔고가 비어야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고, 아빠는 용돈이라도 쥐어줘야 낚시라도 끌고 가서 옆에 앉혀둘 수 있다. 아들은 여친 꽁무니만 따라다니며 결혼할 날만 기다린다. 이 아이 인성 교육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자.



심 서방, 오늘 무단 지각했으니 남아서 얼굴 좀 보고 가.

"무단지각 반성문 A4 한 장 깜지 써서 낼 거지?"

"아니요. 딴 거 할래요. 청소할게요, 차라리."

"딴 건 없어. 얼른 가서 써."

"아, 못 써요. 나 그냥 갈래요, 아, 진짜 짜증 나, 그걸 어떻게 써요?"

"그래? 그럼 그냥 가."

"진짜요? 나중에 뒤통수 후려치려고요?"

"야, 진짜 너 한 대 맞긴 해야겠다. 엄마를 어떻게 그런 이름으로 저장하냐? 좀 심했지?"

"아, 그럼 뭐라고 저장해요? 옛날에는 비상금이라고 저장했는데."

"빨리 바꿔. 엄마라고 바꾸라고, 이 천하에 못돼 먹은 패륜아야."

"그거 바꾸면 집에 가도 돼요?"

주섬주섬 꺼내서 바꾼다. '엄마' 써놓곤, 잠시 저장 버튼을 누르지 않고 멍.

"전화 걸어, 이제. 빨리 저장하고 전화하라고."

얼결에 급히 저장 버튼 누르곤, 눈이 휘둥그레진다.

"빨리 전화해. 엄마한테. 그냥 잘 지내시냐고."

"싫어요. 나 원래 엄마한테 전화 안 해요. 왜 이런 걸 시켜요?"

"영상통화시키기 전에 빨랑."

"아, 싫어요, 아, 뭐예요, 아, 진짜, 아, 미쳤어요? 아, 진짜, 이씨!"

줄행랑. 그러게. 오글거리긴 하겠다.



밤 11시에 늦은 문자.

선생님, 이놈이 웬일로 전화가 왔어요. 숙제라면서. 이런 숙제 매일 좀 내주세요.

매일 내준다고 할 녀석이 아닌데. ATM님께 좀 미안하긴 했나 보다. 그러더니 종종 엄마 전화를 받기 시작했다. 방학 때는 아빠 잔소리 폭격을 피해 심지어 엄마네 집에서 한 달을 먹고 자고 왔다. 부모님의 별거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하나 뿐인 아들 폰에 두 분은 '모친', '아빠'로 저장되는 영광을 얻으셨다. 그날의 숙제가 무슨 결정적인 일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미 끊을 수 없는 실타래가 뒤엉킨 채, 그래서 종종 너무 숨이 막히게 조여들기도 했을, 그 끈이 분명히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심 서방은 여름 방학이 끝나고 여친과 헤어졌다.

이럴 거면 왜 그 난리를 쳤다냐. 여친 없는 생활은 더 방탕해졌고 나는 약점 잡을 무기를 잃었지만, 최소한 뭔지 모르게 나에게 함부로 선을 넘어오지는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간이 되어가는 걸까? 그런데 가끔 궁금하긴 하다. 나는 그 녀석 폰에 뭐라고 저장되어 있으려나. 아아, 상상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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