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늘 그래왔듯 지우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지난번 지우를 만났을 때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봤던 얼굴이 일주일 내내 마음에 걸렸다. 오늘은 재밌게 수업을 하려고 보드게임도 챙겼다. 가끔 어휘보드게임이나 이미지텔레 게임을 하면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다. 지우와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 준비한 보드게임과 약간의 간식을 들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우네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지우 어머니와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지우 집에 있어요. 벨 누르면 열어줄 거예요."
"아. 네..."
"잠깐, 마트에 다녀올게요. 지우랑 수업하고 계세요. 참, 선생님. 우리 지우 좀 따끔하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좀 해주세요. 요즘 자꾸 제시간에 숙제를 안 하려고 해요."
지우어머니는 날 보며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잰걸음으로 밖을 향해 걸어갔다.
지우네 현관문이 열리자 지우가 문 앞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했다. 시간마다 문을 열고 뻐꾸기 소리를 내며 몇 시인지 알려주는 뻐꾸기시계처럼 어쩌면 지우는 하루에 3번 아니 4번일 수도 있겠다. 아무 생명 없는 뻐꾸기처럼 지금 저런 모습으로 선생님들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무거운 추를 단 듯 마음이 착잡했다.
나는 지우 방 한가운데 놓인 책상 옆 의자에 앉자마자 지우가 먼저 말하기 전에 얼른 손소독제를 두 번 눌러 손에 묻힌 후 가볍게 비비며 지우를 바라봤다. 그러자 지우도 마치 종교의식처럼 손소독제를 손에 묻히고 꼼꼼하게 손바닥과 손등 손가락 사이사이까지 손소독제가 묻도록 비벼댔다.
"지우 잘 지냈어? 주말에 뭐 했어? 재밌는 일 있었니?"
지우와 좀 더 친해지려고 주말 이야기를 꺼냈다.
"주말까지 수업하고... 음... 재밌는 일은 없었어요."
지우가 주말에도 수업을 한다는 걸 깜박하고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순간 지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선생님, 재밌는 일은 아니지만 엄마랑 병원 갔었어요."
"병원? 왜? 어디 아팠어?"
"제가 요즘 죽음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해서 잠을 잘 못 자거든요."
"죽음? 그게 무슨 말이야?"
"선생님, 저희 할머니는 언젠간 죽잖아요. 엄마도 나이를 더 먹어서 할머니가 되면 죽을 거고요. 그게 너무 무서워요. 선생님, 사람은 왜 죽어요? 안 죽을 순 없나요?"
죽음에 대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은 지우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당황한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분명한 건 고작 열두 살 밖에 안 된 이 아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는 거다.
"지우가 할머니나 엄마가 나이가 들어 돌아가시게 될까 봐 무섭구나?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 그러니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고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그저 미래의 일보단 현재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이라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아이에게 그 따위 걱정은 집어치우고 지금 열심히 잘 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건지 속으로 되짚고 있는데
"선생님, 일어날 수도 있잖아요. 엄마나 할머니한테 사고가 나면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거잖아요."
얄팍한 수 따위는 소용이 없었다. 지우는 똑똑하고 생각이 깊었다. 사고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다. 지우 말이 맞다. 오빠도 평온한 일상이 영원할 것만 같았던 믿음을 부숴버리지 않았나. 지우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더 이상의 말을 잇지 못하고 대충 얼버무리며 얼른 교재를 펴고 수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지우 엄지 손가락을 감싸고 있는 반창고가 자꾸만 눈에 거슬렸다. 양손 엄지손가락에만 있는 반창고를 보며 왜 다쳤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지우야, 엄지손가락은 어쩌다 다친 거야?"
"아... 이거요? 제가 손톱을 무는 습관이 있거든요. 엄마가 물어뜯지 못하게 반창고를 붙인 거예요."
"잠깐 봐도 될까? 보여줄 수 있어?"
지우는 무심하게 반창고를 뜯어내더니 엄지손가락을 보여주며
"어, 손톱이 조금 자랐어요."
라고 말했다. 손톱이 덥고 있어야 할 살이 3분의 1이나 드러나 있고 손톱 끝은 그 살을 파고 들어가 있었다. 보기만 해도 너무 아파 보였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지우가 눈치챌까 봐 얼른 표정을 바꾸며
"많이 아팠겠다. 약은 발랐어?"
하고 지우를 쳐다봤다. 지우는 아무렇지 않다는 몸짓을 하더니 책상 서랍을 열고 반창고를 꺼냈다.
"괜찮아요. 엄마가 보기 전에 다시 붙여야겠어요."
혼자서 반창고를 붙이는 게 힘들어 보여 반창고를 지우 엄지손가락에 붙여줬다. 그러곤 나도 모르게
"지우야, 선생님이 지우 엄지손가락 반창고에 해바라기 그려줄까?"
나는 고흐에 작품 중에 '해바라기'를 가장 좋아한다. 노란색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고흐 자신의 작업실을 장식하고 친구인 고갱을 맞이하기 위해 그렸다는 게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고흐가 남프랑스 아를로 이사를 한 후 작업실을 꾸미기 위해 해바라기를 많이 그렸다. 아름다운 곳에서 친구 고갱과 그림을 그리며 살 수 있다는 희망에 가득 차기도 했다. 이 시기에 고흐는 가장 행복했다. 해바라기를 그리면 희망이 생겨 나도 행복감에 젖어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일종에 부적 같은 셈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우에게 해바라기를 그려주고 싶었다.
"해바라기 꽃이요?"
"응, 선생님 해바라기 잘 그려. 다음에 지우 손톱 많이 자라면 그땐 반창고가 아닌 손톱에 예쁘게 그려줄게."
지우는 미심쩍게 날 쳐다보더니 천천히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난 네임펜으로 열심히 해바라기를 그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생각했던 것보다 제법 잘 그려졌다. 지우가 반창고 위에 그려진 해바라기를 물끄러미 보더니 마음에 들었는지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선생님 귀엽고 예뻐요. 다음엔 손톱에 그려주신다고 했죠?"
해바라기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양손 손가락을 쫙 펴 보면서 지우가 웃었다.
"그럼, 이거 보다 더 예쁘게 그려줄 게. 그러니까 손톱 꼭 예쁘게 길러야 돼. 알았지? 약속!"
지우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지우는 웃으면 눈이 반달 모양이 되고 한쪽 볼에 살짝 보조개가 생긴다. 처음으로 어린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무표정 뒤에 감춰져 있던 지우의 미소는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아기의 미소처럼 사랑스러웠다.
작고 귀여운 세상에서 가장 작은 해바라기가 지우 엄지손가락 위에서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