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높이 자유롭게
아파트 정문을 들어서는데 경찰차 1대가 눈에 들어왔다. 경비 아저씨들과 경찰관 2명이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며칠 전에 도둑이 어느 집 세탁실 창문으로 들어가서 금품을 훔쳐 달아났다는 얘기를 엄마로부터 들었다. 그 일로 대화를 나누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지나갔다.
'뚜뚜 뚜뚜뚜'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향긋하면서 매콤한 비누향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어느 날 엄마가 비누공예를 배워서 한 개 만들어 오빠 방에 두었다. 오빠가 냄새가 좋다고 한마디 한 것뿐인데 그날 이후 집안 곳곳에 비누가 놓였다. 난 비누향을 맡으면 매콤한 냄새가 나서 싫어했지만 우리 집 모든 선택권은 오빠가 주도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저 하라면 하고 먹으라면 먹고 맡으라면 맡아야 한다. 어쩌면 난 오빠를 위해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인자 이모와 통화할 때
"원래 둘째 계획은 없었는데 가람이 키우다 보니 애가 너무 외로워하길래 새롬이를 가진 거잖아. 지금 생각해 봐도 새롬이 낳길 정말 잘한 것 같아. 가람이가 새롬이랑 얼마나 잘 지내는데."
"가람이가 새롬이 공부도 가르치면서 자라더니 글쎄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어. 호호호. "
하는 소리를 들었다. 전교 1등 타이틀을 가진 오빠 덕에 착한 딸인 척을 해야 했던 난 20살이 되면 춘향이가 목에 걸린 칼을 벗고 옥문을 걸어 나오듯 자유의 몸이 될 거란 상상을 수도 없이 했다. 대학교 합격하는 날 부모님 몰래 가출하여 오빠만 사랑하는 엄마에게 꼭 복수하리라 다짐했다. 그날부터 엄마가 주는 용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으고 있다.
주방으로 걸어갔다. 식탁 위엔 예쁘게 잘 깎인 사과와 배가 랩으로 감싼 접시에 정갈함을 뽐내며 줄 서 있고 그 옆엔 엄마가 갓 구워낸 쿠키가 귀여운 곰돌이 모양을 한 접시에 앙살 맞게 놓여 있다. 그리고 엄마의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들, 오늘 시험 잘 봤어? 고등학교 입학하고 첫 시험이라 많이 떨렸지? 우리 아들 수고했어. 간식 먹고 오늘은 학원 안 가도 되니까 푹 쉬세요. 사랑해.
오빠가 먹었어야 할 간식이 그대로 있다는 건 아직 오빠가 집에 안 왔거나 집에 있지만 간식을 먹지 않았다는 거다. 우선 오빠 방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오빠가 없다. 아직 오지 않았다. 오빠가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난 랩을 살짝만 들어 사과 한 조각을 손으로 집어 보란 듯이 한입 깨물었다. 나를 위한 간식이 아닌 게 못내 서운했지만 그래도 사과는 달고 맛있다. 오물거리며 사과를 먹고 있는데 내 휴대폰이 울렸다.
"아빠, 왜? "
전화기 너머 아빠의 숨소리가 조금 거칠게 들렸다.
"새롬아, 어디야?"
"집인데 왜?"
뭔가 이상하다. 거친 숨소리 너머로 아빠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집이구나. 아빠가 데리러 갈게. 잠깐 있어. 알았지?"
"응? 지금? 어디 가는데?"
"......"
한참의 침묵 끝에 아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병... 원..."
공부 잘한다는 애들만 갈 수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첫 시험을 다 치른 날 오빠는 아파트 15층에서 떨어져 17년 짧은 생을 마쳤다. 경찰이 엄마에게 건넨 오빠의 유서엔
엄마, 사랑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잘못했습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무엇을 잘못했다는 걸까. 다른 과목은 전부 90점 이상인데 수학 성적만 70점 받은 게 잘못했다는 걸까. 아니면 스스로 생을 종결시킨 것이 잘못했다는 걸까. 내게 죽음이란 공포와 감당할 수 없는 이별을 주고 간 오빠가 미웠다.
"오빠, 이거 뭐야?"
"갈매기의 꿈."
"갈매기? 새잖아. 새가 꿈이 있어?"
"응, 이 갈매기는 다른 갈매기랑 달라. 자기만에 꿈이 있어."
"어떤 꿈?"
"이 책에 나오는 갈매기는 누구보다 멋지고 빠르게 날기를 꿈꿔. 먹이를 찾기 위해 나는 게 아니라 그냥 나는 게 꿈인 거지."
"갈매기는 날 수 있는데 왜 나는 게 꿈이야?"
"갈매기라고 다 멋지고 높게 날지 못해. 그런데 이 갈매기는 하늘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했어."
"아, 어렵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새롬아, 나도 먹이를 찾기 위해 해안가를 낮게 나는 갈매기가 되고 싶지 않아. 더 높이 자유롭게 날아보고 싶어..."
하얀 날개를 펴고 상공을 나는 갈매기 한 마리가 그려진 책 한 권이 책상 위에서 어서 책표지를 넘기라고 재촉하듯 노려본다. 이번 주 중학생 수업 때 토론할 책이라 읽어야만 한다. 나는 오빠가 죽고 난 후 이 책을 처음 읽었다. 오빠가 왜 짧은 생을 마쳐야 했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늘 오빠가 이야기했던 게 생각나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5학년 아이에겐 너무 어려웠다.
선뜻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즈음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오니?"
"상황 봐서 가게 되면 갈게."
"오늘 무슨 날인지 알지? 잊지 말고 꼭 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엄마는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해마다 알람소리처럼 걸려오는 엄마의 전화로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어버렸다. 죽은 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기일을 챙기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오빠의 생일을 챙기는 엄마가 이해할 수 없지만 외면할 수 없다. 난 20살 대학에 합격하면 가출하는 게 꿈이었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아들 교육 잘 한 훌륭한 엄마에서 하루아침에 지나친 교육의 부작용으로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몹쓸 엄마로 전락한 엄마는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윤기 있는 굵은 웨이브 머리카락은 다 빠져 오백 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큰 탈모자국이 듬성듬성 생겼고 생기 있던 뽀얀 피부는 거칠고 검게 변했다. 우울증 약을 먹고 하루종일 소파에 누워있는 엄마는 겨우겨우 살아내고 있었다. 하루 한 끼도 아빠의 성화에 마지못해 먹다 보니 살은 계속 빠져 깡마르고 초췌해졌다. 그런 엄마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