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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리 Jul 08. 2018

탱자탱자 출판인의 스마트한 하루

반지하방에서 이루어지는 역사(?)

텀블벅을 통한 <미란다처럼>의 크라우드 펀딩이 겨우 성공을 했으니(성공률 109%!) 드디어 실제 제작에 들어갈 차례였다. 여러 도움을 받아 완성한 본문 디자인 파일과 표지 파일을 PDF로 인쇄소에 보냈다. 막상 제작에 들어가고 보니 뭔가 잘못되진 않을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량생산 아닌가! 


책이라는 제품을 1500부나 만드는데 그게 다 내 손에 달려있다니!!! 엄청난 압박감이 몰려왔다. 마지막에 파일을 건드리는 바람에 오탈자가 생겼다거나 이미지가 밀렸다거나 차례에 쪽수가 엇나갔다거나 폰트가 깨진다거나 이미지가 잘린다거나 별별 제작 실수에 대한 상상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서점에서 팔 수 없는 실수가 나오면 어렵게 모은 제작비가 다 날아가버릴 텐데...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혼자 하는 출판은 결정의 권한을 다른 이에게 미룰 수도, 결정의 순간을 한없이 미룰 수도 없다. '최종'이라는 이름을 단 PDF 파일은 그렇게 인쇄소로 가서 1500부의 책으로 탄생했다. 실수가 있어도 다 품은 채로 <미란다처럼>이 탄생했다. (실수가 있는 건 당연한 사실로... 여러분, 들어보셨을지 모르겠지만 출판사에는 오탈자 요정이라는 (요망한) 것이 살고 있답니다.)


인쇄소에서 제작된 책은 내가 계약한 물류창고로 바로 배송된다


책 제작 전에 직접 가서 계약했던 물류창고에 책이 입고되었다는 소식을 받고 바로 물류창고로 출동했다. 


물류창고가 있는 문산 역까지 창 밖 풍경이 변하는 걸 지켜보는 재미


차가 없는 나는 홍대입구에서 경의중앙선을 타고 종착역인 문산역까지 창밖을 구경하며 가면 된다. 도착해보니 창고에 착착 쌓여있는 <미란다처럼>이 보였다. 아, 내가 만든 책이 너무 많이 쌓여있는 광경을 보는 기분이란... 한마디로...


'많다!!'


많아서 좋다는 뜻도, 너무 많다는 뜻도, 정말 완성이 되긴 했구나 하는 뜻도 담겨있는 아주 복잡 미묘한 감정이 올라왔던 것 같다.



책이 나온 것을 보고 사람들은 자식이 태어난 것처럼 기쁘지 않냐고 했지만 사실 내 마음은 심란했다. 책을 열면 곧바로 잘못된 것만 눈에 들어올 것 같아서 한동안 책을 들춰보기가 두려웠다. 내 자식이라 무조건 예뻐 보인다는 건 다른 사람 이야기였다. 얼마 전에는 두 번째 책을 만들었는데, 역시나 책을 받자마자 부족한 점부터 보이고 아쉬운 것 투성이었다. (그럼 만들기 전에 잘할 것이지. 나도 참 구제불능이다.)


자, 그럼 대체 언제 '스마트'한 하루가 나올까? 뭐, 쉽게 예상할 수 있다시피 '스마트'하다는 건 '스마트 워크'에서 나온 말이다. 요즘에는 '디지털 노마드'라는 말로도 표현하는데 시간과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일할 수 있는 걸 말한다. 뭐, 나의 경우에는 그냥 '집에 짱 박혀 뭔가를 하긴 하는데 언제 끝이 나는지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뭐 그런 거다.


책을 만들기 전까지

회사를 그만두고 출판사를 등록했지만 계약은 진행 중이었고 어딜 나가는 일이나 다른 사람과 교류할 일이 없이 집에서 혼자 뒹굴(?)거리다 보니 시간의 단위 개념이 사라졌다. 한 시간을 하루 같이 쓰기도 하고 하루를 한 시간 같이 흘려보내기도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번역을 막 시작하던 시절 그린 그림


회사에 다닐 때는 출근해서 하루 종일 놀지언정(!) 강제로 들어오는 일이 있으니 뭔가 하긴 했다는 기분이었는데 출퇴근을 안 하니 정말 시간 관리가 어려웠다. 아무래도 나만의 일정을 세우고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듯했다. 가끔 밖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면 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질문을 받을 때가 많았다.


"아, 지금 번역하고 있어요."


초반에는 상황을 모면하기에 이 대답이 썩 괜찮았는데, 3개월 후에도, 또다시 3개월 후에도 같은 대답을 해야 해서 민망한 나머지 사족이 주절주절 따라붙었다.


"아직 번역하고 있는데요, 이게 책이 꽤 두꺼워요. 300페이지 넘는 데다가 그림도 그려야 하고... 가끔씩 맡는 다른 출판사 편집 일도 있어서 좀 늦어지네요. 하하-"


책을 만들고 난 후 - 침대에서 시작하는 업무


아침 8시쯤 슬쩍 눈을 뜨고 스마트폰을 확인한다(솔직히 고백하자면 9시나 10시에 눈을 뜰 때도 많다). 알림이 쌓여있어서 보니 교보문고에서 온 문자와 알라딘에서 온 인터넷 팩스다.


교보문고에서 보내는 주문 문자


교보문고에서는 이런 식으로 문자가 오는데 주문하는 책이 어떤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물론 한동안 책덕에 책이 <미란더처럼>밖에 없었기에 확인할 필요도 없이 그냥 <미란다처럼>을 보내면 되었다.


인터넷 팩스 앱으로 알라딘이나 지역 서점의 주문을 확인한다


알라딘에서는 팩스로 주문서를 보낸다. 인터넷 팩스 앱인 엔팩스로 받은 팩스도 확인할 수 있고 사진이나 문서를 보낼 수도 있다. 이렇게 스마트한 세상이라니!


그리고 이렇게 들어온 주문을 물류창고에 오전 11시 전까지 알려줘야 한다. 카카오톡에 등록된 물류창고 대표님께 바로 메시지를 보낸다. (보통 물류창고에서 제공하는 주문관리 프로그램을 사용하지만 사용료가 있다. 물류창고 측에서 1종뿐이니 카톡으로 알려달라고 배려해주셔서 두 번째 책이 나오기 전까지 카톡으로 주문을 전달했다.)


<미란다처럼>을 보관하고 배본해주는 고마운 물류창고


여기까지가 침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스마트 워크 장면 되시겠다. 아침잠이 많은 나는 이렇게 11시 전까지 주문 업무를 처리하고 다시 잠에 들 때도 있다. (주문이 없는 날은 아침잠을 넉넉하게 잘 수 있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이렇게 '스마트'한 주문 업무가 끝이 나면 블로그에 출판 과정을 올리기도 하고 SNS에 책덕의 소식도 올린다. 틈틈이 다른 출판사의 편집 일도 하고 여러 가지 잡기술을 익히기도 한다. 웹자보 디자인, 전자책 제작, 마케팅 방법, 1인 출판사는 혼자 할 수 있는 기술이 많을수록 돈을 아낄 수 있어서 어떻게든 직접 배우려고 한다. 물론 내가 만든 책과 그 가치를 알릴 수 있는 기술들이기에 그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겠지.


가끔은 어떻게 알았는지 지역 서점에서 책을 주문하는 팩스가 온다. 그러면 팩스로 입금요청서를 보낸 후 입금을 확인한 다음 다시 물류 창고 대표님께 메시지를 보낸다. (지방 주문은 3시까지 접수하면 된다.) 


마침 <미란다처럼>을 낼 당시가 작은 책방(독립서점)이 하나, 둘 생기던 때라서 책을 입점하기 위해 문의 메일을 보낸 후 입고 요청이 들어오면 책을 등에 지고 거리로 나섰다. 개성 있는 책방들을 방문하는 것은 일이라기보다 설레는 소풍 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자전거 배달도 가끔 갔음.


이동하는 시간에는  <미란다처럼>를 어떻게 하면 재밌는 방법으로 알릴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내 시간과 몸은 조금 축나겠지만 그래도 소울리스한 마케팅보다는 책을 만나는 방식이 파는 나도 재밌고, 사는 독자도 재밌는 경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출판사에 고용되어 있을 때는 출간 일정과 판매율을 생각해야 해서 할 수 없었지만(당연히 많이 팔리는 대형서점에 마케팅을 집주하게 되니까) 내 마음대로 하려고 시작했기 때문에 괴상한(?) 상상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상상하다 보면 가끔은 무리수 아이디어(말달리기 마라톤이나 책 한 줄로 잘라붙이기)가 떠오를 때도 있긴 하지만, 그냥 이 모든 과정이 나다운 일이기에 재미있다. 


책이 독자에게 가닿는 데는 서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책을 만들면서 소개하고 싶었던 출판사의 목소리가 대형서점에 위탁되는 순간 작고 인지도 없는 목소리는 묻혀버리고 만다. 그냥 딱딱한 보도자료로만  서점 데이터베이스에 올라갈 뿐. 작은 출판사는 서점에 다양한 책을 소개하는 큐레이션을 기대하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이다. 


나오자마자 대형서점 서가에 등만 보이며 꽂혀버린 <미란다처럼> (좌: 교보 잠실점 / 우: 교보 광화문점)


편집자는 책을 만들면서 독자에게 꼭 소개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안고 있다. 작은 서점에는 비록 규모가 적을지언정 그런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며 신중한 큐레이션을 하는 서점지기가 있고 그런 목소리를 직접 전달할 공간을 작은 출판사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그 지역, 그 공간에서만 만날 수 있는 독자들, 그리고 큰 서점의 구석 서가에 꽂힌 책으로는 불가능한 우연한 만남을 생각하면 책덕의 책을 진열해준 작은 서점 하나, 하나가 참 소중하게 느껴졌다.


작은 책방과 지역 서점에서만 증정한 에코백


포항 달팽이책방에서 했던 '미란다 상영회'


역시 포항의 달팽이책방에서 했던 '과일 친구들 만들기'


책방에서 재밌게 책을 소개하고 팔았던 일은 나중에 더 이어가 볼까 한다.



여행 갔을 때


2016년 가을에 한 달 반 정도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드디어 리얼 '디지털 노마드족'이 되는 것인가? 설레발을 치며 노트북을 챙겼지만... 딱히 책 주문이 많지 않아서 크~게 신경 쓰이는 일은 없었다. 


다만 문제는 시차! 유럽쪽에 있다 보니 한국보다 시간이 7시간 느렸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걸어 다녀서 녹초가 되어 쿨쿨 자고 있을 새벽 1시쯤부터 주문 문자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새벽 4시가 한국에서는 주문 마감시간인 11시이니 아침에 일어나 주문 문자를 확인했을 때는 이미 마감 시간을 훌쩍 넘긴 뒤였다. 뒤늦게 물류창고에 주문을 전달하긴 했지만 한국 시간으로 밤늦게 보낼 때가 있어서 물류창고 대표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함께 드려야 했다. (물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고 여행 잘하라고 덕담만 해주셨지만.) 


아마 서점에서는 이 출판사가 왜 책을 자꾸 하루씩 늦게 보내나 했을 것이다.


디지털 노마드의 실체. 노트북은 그저 사진보관용 웹하드였을 뿐. 쓸 일이 별로 없었다.


2018년 현재는 주문관리 시스템을 사용하는데 이것 역시 스마트폰 앱이 있어서 여전히 침대에서 아침 업무를 시작한다. 이제는 카카오톡으로 알릴 필요 없이 바로 앱에서 주문을 입력하면 된다. 



이런 편리함이 나 같은 게으름뱅이에게 약인지 독인지 모르겠다. (얼마 전에 집에 인터넷이 안 된 적이 있었는데 거의 패닉 상태였다.) 


어쨌든 오늘도 책덕의 스마트한 하루는 계속되고 있다.




책을 실제로 제작하는 과정은 지루할 수 있어서 생략했습니다. 

혹시 책 제작 과정이 궁금하다면 2015년 당시 <미란다처럼>을 제작할 때의 기록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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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1500부를 만들려면 종이가 얼마나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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