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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고기 잡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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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한우

불교 국가였던 고려가 망하고 성리학 중심 국가인 조선이 세워지고 소위 신진 사대부들은 고기를 먹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특히 쇠고기에 대한 수요는 폭팔적이었다.
우심적이라는 염통 구이가 유행을 하였고 
설하멱이라는 너비아니형태의 구이도 많이 먹었다.
우심적이나 설하멱 어떤 의미에서는 쇠고기가 그렇게 지금처럼 부드럽지 않아서 고기의 부드러운 부위나 고기를 최대한 부드럽게 요리해서 먹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소는 식육이기에 앞서 농사를 짓는 트랙터의 역할이 더 큰 조선시대라 태조 7년 1398년 부터 거의 지속적으로 소의 도축을 금하는 우금령이 내려졌다. 
따라서 그 시절 소를 도축 거래하는 백정은 늘 범법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박제가의 북하기에 의하면 일일 소의 도축 두수가 500두 다.
일제 강점기의 소의 평균 년령이 6세 정도 였으니 이를 감안하면
300일 × 500두 = 150,000두
다시 150,000두 × 6년  = 900,000두 
단순히 이 계산법이면 조선시대에 이미 조선반도에 소가 90만두 이상 사육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지금처럼 소고기를 년중 지속했던 것이 아니라 가을 추수가 끝나고 난로회(음력 10월 전골냄비에 쇠고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재료를 담고 육수를 부어 끓인 음식을 둘러앉아 먹던 풍속.)를 시작으로 이듬해 봄까지 겨울에 집중되어 소비되었던 것 같다.
농사를 짓는 기간에는 소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쇠고기 가격이 돼지고기 가격보다 쌌다.
이는 쇠고기는 반촌(반중()’·‘관동()’이라고도 한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앞의 일대이다. 성균관을 ‘반궁()’이라고도 하는데, 반촌은 여기에서 나온 말이며, 반궁은 중국 주대()의 제후의 학궁()이었다.1398년(태조 7) 성균관건물이 처음으로 완성되었을 때에는 사역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반촌은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태종 때에 전답 1,000여 묘()와 노비 300명이 성균관에 하사되었는데, 이 노비들은 이미 고려의 성균관에 소속되었던 자들로 보인다.
이들은 성균관에서 문묘수직·관원사환·관생식사제공 등 각종 사역을 담당하였으므로, 지리적으로 입역()이 편한 성균관 주변에 모여 살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성종 때 성균관 입구의 민가를 철거하고, 성균관을 감싸고 흐르는 반수()의 서쪽을 경계로 삼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반촌은 이때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성균관은 국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고 공자를 배향하는 신성한 곳이었으므로, 순라군과 의금부의 이속들조차도 감히 반촌에 들어가지 못하였던 시대도 있었다.
반촌 거주민은 반인()·관인()이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6개월마다 번()을 나눠 입역하였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각기 상업 등의 생업에 종사하였다.
이들 가운데 재인()이라고 불린 백정들이 도살업에 종사하였다. 성균관의 제사에 소용되는 희생()을 잡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으며, 현방() 혹은 다림방이라고 하는 푸줏간을 독점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따라서 도살업이 조선 중기 이후 반인들의 가장 중요한 생업이 되었다. 반인들의 도움을 받은 성균관생이 관리로 출세하게 되면, 그 대가로 반인의 현방 영업을 지원하였다. 성균관 동쪽 뒤편의 반촌에는 관리 12위를 모신 숭보사()가 있었고, 광복 몇 년 전까지도 제사를 지냈다.
숙종 연간의 성균관 입역노비는 340호 2,000∼4,000여 명 정도였고, 반인의 인구증가로 반촌은 점차 커져서, 정부에서도 반촌 동쪽의 사섬시() 공터를 제공하는 등 조처를 취하였다.반촌 [泮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역인들이 한양에 23개의 현방을 운영 거래 되었으나 돼지고기는 자가 소비에 의존하고 거래량이 매우 미미하였다. 그래서 단순한 수요 공급 논리에 의해서 돼지고기가 더 구하기 힘든 고기였다. 
현방(도사() 또는 다림방이라고도 하였다. 성균관 노비들은 문묘를 지키는 관원들의 사환으로 입역하기 때문에 생계유지를 위하여 소의 도살판매권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권의 대가로 매달 삼법사( : 형조·한성부·사헌부)에 세금을 납부해야 하였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현방 이외의 도살은 사도()라 하여 금지되었던만큼, 현방은 비록 평시서()의 시안()에는 등록되지 않았지만, 거의 시전의 특권을 누리는 상인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현방의 수는 소 전염병이나 국휼() 등에 의하여 변동이 심하였는데, 현종 이후로 적게는 10개소, 많으면 20개소 내외로 설치되어 있었다.현방 [懸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시대 현방은 단순히 지금 생각하는 정육점 개념이 아니라 도축 가공 판매를 일괄하는 쇠고기 종합처리장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런 의미해서 조선시대 한양에는 적어도 23개의 쇠고기 전용 도축장이 있었다. 이는 냉장 기술이 없었던 조선시대는 소비지 도축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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