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의 밤은 서울의 밤과는 다르다. 서울의 밤은 도시의 네온사인과 자동차의 불빛들, 그리고 가로등의 조명들이 화려하면서도 환상적인 야경을 만들어 낸다면, 리마의 밤은 서울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갈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이 있다.
처음 페루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로부터 불안한 남미의 치안에 대해 듣게 되었는데, 이 이야기들은 여정의 마지막까지도 호스텔과 거리에서 만난 한국인들로부터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지만 치안이 걱정되어 남미의 아름답고 환상적인 밤을 만날 수 없다면 그것은 큰 낭패가 된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잘 지키는 일이다. 가능하면 위험하기로 악명이 높은 곳은 피하는 것이 좋고 밤에는 사람이 많거나 큰 번화가 중심으로 다니는 것이 안전하다.
리마의 밤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가까운 카페에 가서 커피라도 한잔 할까 해서 거리로 나왔다. 숙소를 나오니 도로 맞은편에 카페가 보였다. 낮 동안 꽤 무더워서 그런지 밤에 마시는 아이스커피는 무척이나 달고 시원하다.
'지금 우리나라는 무척이나 추울 텐데 여기는 이렇게 덥다니..'
한국에서의 12월부터 2월까지는 남미에서 여름휴가철과도 같다. 여름 시즌에만 만날 수 있는 행사나 프로그램들이 있으며 특히, 물에 반영된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을 만나고 싶다면 우기인 12월부터 2월 사이에 여행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날씨나 환경의 조건에 따라 만나지 못할 수 도 있으니 운도 따라주어야 한다. 이렇게 얘기하니 우리나라에도 운이 따라주어야만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문득 떠올랐다. '독도'
독도에 입항하기 위해서는 바람과 파도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일도 허다하다. 오죽하면 '섬이 허락을 해야 들어올 수 있는 곳'이란 이야기마저 있을까.
그래서 평생 한 번을 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실제 하는 '환상'을 보기 위해 그 시기에 많은 여행자들이 남미로 여행을 떠난다.
커피 한잔을 시원하게 들이켜고는 숙소에서 받은 지도를 펼쳤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워낙 구글맵이나 각종 길 찾기 어플들이 잘 되어 있어서 목적지와, 이동경로, 비용, 예상시간까지 상세히 알려주기 때문에 휴대폰 하나만 있으면 전 세계 어디에서도 길을 잃을 걱정은 없을 것 같다. 그런데도 역시 난 디지털보다 아날로그가 더 좋다. 예전처럼 지도에 빨간펜이나 검정펜으로 체크하고 기록해가며 나의 이동경로를 확인해 가는 것이 좋다.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지도만 보아도 내가 여행했던 모든 기억들이 떠오르니까.
물론 지도만으로 모든 정보를 알 수 없으니 구글맵도 함께 사용을 하기로 했다.
'레제르바 공원이라고 밤에 가면 멋진 분수 쇼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데.
마침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거기 갈래?'
함께 커피를 마시러 나온 영호가 말을 했다. 마침 리마의 밤을 느껴보고 싶다고 거리를 나선 터라 잘되었다 싶어 함께 가자고 했다. 공원이나 산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별로 레제르바 공원에 대한 기대 같은 건 없었다. '여태껏 보아온 공원들과 분수대 비슷하겠지'라고 생각했다.
레제르바 분수 공원
늦은 시간인데도 공원의 입구는 표를 구매하려는 사람들과 입장하려는 사람들로 긴 행렬이 이어졌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내가 그동안 보아왔던 공원과 분수들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밤인데도 분수 쇼를 보기 위해 온 리마의 시민들과 여행자들이 가득했고 가로수의 스피커에서는 웅장한 음악들이 흘러나왔다. 축구장만한 크기의 메인 분수대와 그 주변에 있는 여러 크기의 분수대가 조명을 받으며 화려한 색색이 옷을 입고 패션쇼라도 하듯 그 자태를 뽐내었고, 물줄기들은 음악의 리듬에 맞춰 크거나 작게 또는 흩뿌리며 마치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듯 놀라운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전혀 기대가 없었기에 눈앞에 펼쳐진 장면들은 계속해서 입 밖으로 감탄사를 내뱉게 했다.
분수대를 지나 공원의 한쪽으로는 야시장의 포차들이 길게 줄지어있다. 메뉴들도 다양해서 많은 사람들이 각자 먹고 싶은 음식들을 파는 포차에 가서 주문을 하고 음식들을 받아온다. 우리도 주문했던 핫도그를 받아 한입 베어 물고는 공원의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가족끼리 온 사람들, 연인과 함께 밤마실을 나온 사람들, 다른 나라에서 여행을 온 사람들이 한데 섞여 축제와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잠시 후, 스페인어로 안내 방송이 나오더니 이윽고 장엄하면서도 웅장한 음악이 연주된다. 그리고는 축구장만 한 분수대와 그 주변의 분수대들이 찬란한 오색 빛깔을 내며 레이저와 함께 분수대의 물줄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레이저는 어두운 밤하늘에서 현란한 움직임과 함께 글자와 문양들을 그려내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감탄과 환호성을 질렀다. 지금껏 보아왔던 분수쇼 중 가장 스케일이 크고 아름답고 웅장한 공연이었다.
동네 분수광장을 생각하고 왔다가 라스베이거스 분수쇼를 본 기분이랄까. 단아하고 정갈한 리마의 밤이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레제르바공원의 분수 쇼
분수쇼가 끝나고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창밖으로 지나쳐가는 리마 시내의 불빛들을 보며 앞으로 예상조차 하지 못하는 어떤 모험들이 펼쳐질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렇게 리마에서의 밤은 지구 반대편에서 온 이방인에게 환하게 미소 지으며 반갑다고 맞이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