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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시들과의 추격전

by 상진



쿠스코에 도착해서 처음 먹는 밥은 어떤 것을 먹어야 할까.

페루에 도착해서 여행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쯤 되었다. 이쯤 되니 집에서 먹던 밥들이 간절하게 생각났다. 이곳에 온 뒤로 먹던 음식들은 하나같이 무척 짜거나 샌드위치, 열대과일 같은 것들 뿐이었으니 하얀 쌀밥에 뜨끈한 찌개가 얼마나 그리웠던지.

그나마 와카치나에서 먹던 음식들이 간도 적당하고 한국식과 많이 흡사해서 며칠 동안은 그럭저럭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쿠스코까지 이동하면서 쌓인 여독에 고산증까지 더해지니 머리는 지끈거리고 속은 울렁거려 몸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영호와 나는 고심 끝에 쿠스코 골목에 유명한 한식당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곳으로 결정했다. 우리가 가려는 한식당은 아르마스 광장의 인근에 있어서 찾아가기가 수월했다. 몇 개의 상점과, 몇 번의 골목길을 지나니 '사랑채'라는 이름의 식당이 보인다. 그저 한식당을 발견한 것이 이리도 기쁠 줄이야.

'사랑채'라는 간판 뒤로 열린 가게 입구 안으로 들어서니 낯익은 한글과 한국식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동네 밥집이라도 온 기분이 들었다.

테이블에 자리 잡은 우리는 삼겹살과 된장찌개, 뚝배기 불고기를 주문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한식은 무척이나 반갑고 설렌다. 잠시 후, 주문했던 메뉴들이 테이블 위로 속속 자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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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이게 얼마만의 한식이냐..'


테이블 위에는 아주 잘 차려진 한정식 밥상이 완성되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만나는 한식들이 어찌나 반갑던지 한순간에 피곤했던 기색이 사라졌다. 우리는 허겁지겁 고기를 굽고 찌개를 입에 털어 넣었다. 먹었다는 표현보다는 '털어 넣었다'가 맞는 표현인것 같다. 그 정도로 정신없이 밥을 먹었고, 그때 먹었던 삼겹살과 찌개의 맛은 지금까지도 입안에서 맴도는 것만 같다. 맛있다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사랑채'에서 먹었던 한식은 여태껏 외국여행 중 맛보았던 음식 중 단연 최고였다. 이런 걸 보면 역시 나도 '김치맨'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한국 남자인지도 모르겠다. 뜨끈한 밥을 든든히 먹고 맥주도 한잔 하고 나니 긴장이 풀렸는지 잠이 몰려왔다.


'참, 단순하다.'


그토록 피곤하고 힘들었는데 밥 잘 먹고 여유 좀 생기니 잠이 온다. 본능에 충실한 단순함이 지금은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사랑채'에서 한식으로 힐링한 우리는 잠이라도 깰 겸 쿠스코 시내에 딱 하나뿐이라는 스타벅스로 갔다. (쿠스코에 여행을 온 여행자들이 한 번씩은 가 보는 곳이란다.)

음료를 주문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비가 후두두둑 떨어진다. 시내를 조금 더 둘러볼 셈이라 영호가 우산을 챙겨 오겠다며 숙소로 돌아갔고 나는 스타벅스의 입구에서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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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의 스타벅스의 입구는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펼쳐진 골목길 중 하나의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날이 흐리거나 비라도 내리면 사람들의 왕래가 뜸하기도 하고 그림자라도 지면 더욱 어두워진다. 내리는 소나기를 피해 스타벅스 입구의 처마 밑에 서 있는데, 웬 남자 둘이 멀지 않은 곳에서 벽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다.

사실, 그게 담배인지 마리화나 인지도 모르겠다. 워낙 남미에서 마리화나를 피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피우고 있던 것은 잎을 종이에 넣고 말아서 피우는 그런 담배였다. 그들은 서로 얘기를 주고받더니 나를 힐끔 바라봤다. 정확히는 나를 한 번 보고 내 목에 걸린 카메라를 봤다. 그때 나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등골에서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나도 그들을 마주 보니 그들은 헐렁한 옷들을 입고 있었고 심지어 비가 오는데 맨발로 있었다.

한눈에 그들이 집시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남미 여행을 하며 치안의 문제점에 대해 귀가 따갑게 들은 터라 그 순간, 바짝 긴장감이 들었다.


그때! 그들이 어슬렁어슬렁 내게로 걸어온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나는 태연스럽게 천천히 입구에서 나와 골목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들이 뒤 쫓아오는 게 아닌가.

위험을 알리는 나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뛰지 않고 태연히 걸어서 아르마스 광장의 코너로 돌았다. 괜히 그들을 도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 역시 뛰지 않고 손에 담배를 든 채 나를 보며 코너를 돌아 뒤쫓아온다.


'아.. 어쩌지. 맞서야 하나.'


그러나 그들이 어떤 흉기를 갖고 있을지 모르기에 무턱대로 그들과 맞붙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외국방송에서도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절대 그들과 맞서지 말라. 큰 위험이 뒤따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40일가까이 남은 여행을 망칠 수는 없다. 그렇게 마냥 당할 수만은 없었다.

마침 아르마스 광장 중심에서 치안과 관광객에게 안내 역할을 하던 경찰이 생각났다. 나는 중심가로 발걸음을 재촉했고 멀지 않은 곳에서 순찰 중이던 경찰관을 발견했다.

내가 경찰관에게 가까이 가자 나를 쫒아오던 집시들은 방향을 바꿔 다른 곳으로 달아났다.

그들이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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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쿠스코 여행 첫날,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정말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경찰관에게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인사만 건네고 돌아서는데 우산을 가지러 갔던 영호가 그제야 돌아왔다. 그 사이 내리던 소나기는 거짓말처럼 그쳐있었다.

컨디션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일까지 겪으니 기운이 빠졌다. 더 이상 돌아보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아 숙소로 돌아가 나머지 시간은 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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