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고 일어나자 몸에서 뚝뚝 소리가 난다. 입에서도 '끄응' 소리가 연신 터져 나온다. 험한 지형을 여행하며 이동하다 보니 몸에 피로가 쌓였나 보다. 그래도 몸을 일으켜 억지로 스트레칭을 한다.
입에서 계속해서 '악'소리가 나와도 스트레칭을 계속하며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것은 배낭여행자라면 꼭 필요한 일과 중 하나이다.
하루만큼은 푹 쉬었다가 마추픽추에 오르기로 했다. 괜히 피곤에 지친 몸을 끌고 산에 올라갔다가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몸까지 아프기라도 한다면 그런 낭패는 또 없을 것 같았다.
조식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조식으로 나오는 식단은 어느 숙소나 메뉴가 비슷비슷하다. 빵과 우유나 주스. 그리고 수프, 과일 몇 가지, 커피 이렇게 나오는데, 여행을 하며 점심을 어찌 먹을지 모르니 아침은 항상 든든히 챙겨 먹게 된다. 빵에 버터와 딸기잼을 발라 입에 넣고는 물끄러미 테라스 밖을 바라봤다.
식당은 숙소 건물의 제일 위층에 있어서 테라스 너머로 마을의 전경이 아주 잘 보인다.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철도와 정차 중인 기차의 모습은 철도마을로서의 매력을 물씬 보여준다.
내가 살고 있는 연남동에도 마을을 가로지르는 철도가 있었다. 경의선이라 부르는 그 철도는 지금은 운행하지 않는 구간이 되어 공원으로 바뀌었고 공원은 연트럴 파크라 불리며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지만, 연남동은 어릴 적 기억 속에 기차가 오고 가던 철도마을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아구아스 칼리엔테스가 더 친근하고 편하게 느껴지나 보다.
마을은 스페인어로 아구아스 칼리엔테스(Aguascalientes)라 부르는데, Agua(물)과 caliente(뜨거운)의 합성어로 '뜨거운 물'이라는 뜻이다.
갑자기 궁금했다. 마추픽추 마을로 잘 알려진 이 곳의 지명이 왜 '뜨거운 물'인 걸까.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마추픽추를 가려는 여행자들로 가득 찬 유명한 관광지가 되기 전에 마을 뒤편으로 온천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지금껏 마을의 이름이 아구아스 깔리엔테스로 불리고 있다.
일정이 따라주지 않을 때야 어쩔 수 없지만, 보통 여행을 하며 아침을 느긋하게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눈을 뜨고 숙소의 인근을 산책하고 아침식사를 하고, 커피 한잔을 하며 여유롭게 오전을 보내고 점심 무렵 밖으로 나와 여행을 다시 이어가는 것. 나는 이런 여행 스타일을 선호한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받아왔다. 남미의 커피 향과 맛은 참 구수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중남미의 커피를 대거 수입해서 먹기도 하니 현지에서 마시는 커피들은 친근하면서도 아침을 깨우기에 딱 알맞다. 커피를 마시며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마추픽추 마을의 아침은 평화롭고 조용하기만 하다. 작은 마을이지만 기차와 여행자들과 카페와 펍이 있는 곳. 이만하면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춘 최고의 여행자 마을이아닌가.
숙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따스한 햇살이 얼굴을 감싸주었다.
'어제 그리 비가 내리더니..'
비 온 뒤의 오전이라 하늘도 파랗고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이 반갑기만 하다. 숙소 근처에는 식사가 가능한 카페와 펍들이 많아 여행자들은 야외 테라스에 앉아 식사를 하기도 하고 음료를 마시며 여유롭게 보내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좀 피곤해 보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아주 여유로워 보였는데,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아 보였다.
남미 사람들, 특히 페루나 볼리비아 사람들은 대부분 굉장히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향인데 그 때문인지 이 곳으로 온 여행자들도 그들의 분위기를 닮아가나 보다.
마을의 한가운데 파란 기차(페루 레일)가 운행을 준비하며 정차해있다. 기차의 파란색 외관이 마을과 너무 잘 어울렸다. 마치 모리스 할머니의 그림 속 마을처럼 정감 가고 따뜻한 동화마을이라고나 할까.
기차를 지나 조금 더 마을 입구 쪽으로 나가니 역시나 관광마을답게 기념품 가게들이 곳곳에 있다. 페루는 특히나 관광이 주요 사업 중 하나이기 때문에 기념품 가게들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많은 기념품 가게들을 돌아봤기에 오늘은 슬쩍 눈길만 주고는 지나쳐간다.상점들을 지나 마을 입구의 큰 거리로 나오니 코너 한쪽으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뭐지? 유명한 맛집인가?'
무슨 줄일까 궁금해서 기웃거려본다. 알고 보니 그 줄은 마을에서 마추픽추까지 가는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의 줄이었다. 이곳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버스에 탑승하면 산길을 타고 40분 정도를 달려 마추픽추 입구에 세워준다. 내일 마추픽추로 가려면 미리 예매한 표를 들고 이 줄에 서있으면 된다. 버스는 하루 여러 차례 운행을 하니 스케줄에 맞춰 시간을 확인하고 타면 된다.
미리 운행시간과 코스를 확인하고는 발길을 돌리는데 어디에선가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철도 맞은편에서 아이들이 씽씽이를 타고 놀고 있었다. 아이들이 그리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 어릴 적 나도 친구들과 저리 놀았던 기억이 나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까만 피부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아이들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나도 나이를 먹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유롭게 철도 맞은편의 길들도 천천히 걸어본다. 시골마을의 정겨움이 가득 묻어나서 걷는 내내 마음이 편안하고 기분이 상쾌하다. 한참 뒤에 이 여유로운 시간을 오랫동안 그리워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