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해는 빨갛게 주변 하늘을 물들이고 뉘엿뉘엿 저물어간다. 드디어 페루 여행의 꽃이라 부를 수 있는 마추픽추로 향한다. 배낭여행자들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로 차지할 만큼 마추픽추는 여행자들의 로망이고 꿈의 장소로 여겨진다. 일단 마추픽추로 가기 위해서는 오얀따이땀보에서 기차를(페루 레일) 타야 해서 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뜨거운 볕 아래에서 몇 시간을 돌아다닐 때는 더위에 지치고 힘이 들기도 했는데, 그래도 서늘한 곳에서 샌드위치와 콜라를 마시면서 쉬었다고 몸은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페루의 기차는 두 개의 철도회사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잉카 레일이고 다른 하나는 페루 레일이다. 오얀따이땀보에서 페루 레일을 타고 아구아스 깔리엔테스(마추픽추 마을)로 이동한 뒤, 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마추픽추 입구까지 갈 수가 있다. 비용은 프로모션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데 대략 편도 13만원에서 15만원 정도 된다. 페루의 물가 수준으로 보았을 때 기차 티켓값이 꽤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얀따이땀보의 전경
출발시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기차역의 주변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기차역 주변에는 그동안 관광지에서 보았던 기념품 상점들이 즐비하다. 여행지에서의 상점들은 대게 비슷한 상품들을 팔지만,시장을 구경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오얀따이땀보의 모습을 눈으로 담는 게 즐겁기만 하다. 낯선 곳에서의 이색적인 풍경과 문화를 보고 느끼는 것. 이런 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나는 시장을 둘러보기를 좋아한다. 시장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있다. 과일을 파는 사람, 꽃을 파는 사람, 야채를 파는 사람, 또 마실거리나 음식을 파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모습은 세계 어디를 가나 시장이라면 느낄 수 있다. 생동감과 함께 사람들의 삶의 진한 향수들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시장을 둘러보는 사이 어느덧 기차 출발 시간이 다가왔다. 탑승구에 가니 파란색 기차가 여행자들을 맞아주고, 여행자들은 줄을 서서 기차에 올라탔다. 페루 레일의 좌석은 등급별로 가격이 달라지는데 우리가 예매한 좌석은 비스타돔 클래스로 마주 볼 수 있는 자리에 운행 중간, 커피나 간단한 간식이 제공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창문은 바깥의 전경을 두루 볼 수 있도록 옆면의 큰 창과 천장의 면에도 창이 있어서 시야가 확 트인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미 오얀따이땀보를 두루 돌아보고 기차역 근처의 시장까지 둘러보고 온 우리로서는 편안한 좌석에 앉자마자 몰려오는 피로에 바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철컹철컹철컹..'
철도를 따라 얼마나 달려온 걸까. 그리 천근만근이던 눈꺼풀이 스르르르 열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여전히 기차는 철도 위를 달리고 있었고 창밖은 빛 한점 보이지 않게 어둠이 내리깔려 암흑의 세계를 이루었다.
잠시 뒤 기내식으로 나온 커피와 간식을 먹으며 영락이와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차가 덜컹! 소리를 내며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더니 이내 멈추었다. 승무원 몇 명이 분주하게 열차 안을 왔다 갔다 했고 우리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뭐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설마, 탈선된 건 아니겠지?'
웅성대며 걱정하는 우리들과는 달리 열차에서는 아무런 안내방송도 없었다. 그 뒤로 플래시를 든 승무원은 몇 번을 더 왔다 갔다 했다. 다른 승객들은 어쩌고 있다 해서 주변을 둘러보며 반응을 살피었다.
그런데, 웅성대던 건 우리만 그럴 뿐. 다들 침착하고 평온했다. 심지어 기내식을 즐기며 대화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마치 '남미니까 그럴 수 있어! 남미니까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지.'라고 여기듯 그들에게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 이상했다. 분명 기차는 오른쪽으로 기우뚱 기울어져 있는데 그것에 대해 불평하며 승무원들에게 항의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게.
잠시 뒤에 다행히 열차는 다시 운행을 재개했다. 그것도 열차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채로!
'아니, 설마 이 상태로 그냥 달리는 거야?'
설마 했던 기우가 그대로 적중했다. 열차는 기우뚱한 채 목적지까지 달려간다. 이제 와서 생각해봐도 길이 원래 그리 기우뚱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15분쯤 더 달렸을 때 빗줄기가 하나씩 창문을 두들기기 시작하더니 이내 후두두둑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려나 했는데 금세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어느덧 열차는 목적지인 아구아스 깔리엔테스, 마추픽추 마을에 정차했다. 무더위 속 비는 반가운 소식이지만 하필이면 이동하는 지금이라니. 배낭에서 우산을 꺼내고 가방에는 방수커버를 씌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정차한 곳에서 예약된 숙소까지는 멀지 않았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굵은 빗줄기가 우산 위로 쏟아졌다. 노란 가로등 아래 파란 기차는 오렌지 빛을 내며 철도 위에 서 있고, 우리는 인도를 따라 5분여 거리의 숙소로 내달렸다. 퍼붓는 빗속을 달리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닌데도 아구아스칼리엔테스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과 설렘으로 기분이 꽤나 좋았다.
숙소에 도착해 젖은 옷가지들을 널어두고는 샤워를 했다. 샤워기에서 나오는 시원한 물줄기들이 오얀따이땀보에서 아구아스칼리엔테스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하루의 여독을 풀어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