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상처는 깊어진다
어쩌면 그에게 나는 떼어내 버리고 싶은 그의 구질구질한 과거였을지도 모른다. 나로 인해 잊고 싶은 아픈 기억들만 떠오르고 상처는 깊어만 가고 끈덕지게 손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질어빠진 밀가루 반죽처럼 난 그런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그림자 같은 지겨운 과거가 떨어져 나가서 더 홀가분했겠지. 아무리 도망가도 따라오던 그림자. 마치 자신의 발목을 잡는 것 같은. 이혼 후 그가 두어 번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것도 날 보면 좋은 기억보다 그의 아팠던 상처들의 과거가 떠올라 그를 다시 유리 파편처럼 날카롭게 찔러대서였을 것이다. 난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그의 목소리는 한결 밝고 톤업 되어 있었다. 거기에 난 바보같이 "좋았었나 보네. 목소리가 좋아 보인다."라는 실없는 소릴 했고 그 사람은 "출근하고 일하고 뭐 정신없지."란 사무적인 대답으로 내 말을 피해 갔다.
나라는 그림자를 떨쳐낸 그 사람. 이제 밝은 새로운 미래를 시작할 수 있겠지. 구질구질한 힘든 과거를 생각나게 하는 존재가 눈앞에서 없어졌으니 얼마나 홀가분할까. 네가 폭언을 퍼부었던 그날 저녁. 울면서 그렇게 말했었지. 나에게 너무 서운했었다고.
넌 서운했다지만 난 그날 너로 인해 내 삶이 없어졌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지독히도 너 밖에 모르고 니 입장만 생각하는 너에게 말해봤자 넌 이해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내 친한 지인조차 "네가 원해서 그렇게 살았잖아. 네가 선택한 삶이었잖아."라고 하는데 이제 와서 난 너에게 맞춰 살아온 삶을, 그림자 같은 삶을 후회한다고. 아니, 그렇게밖에 선택할 수 없는 삶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한다. 결국 본인의 선택이면서 약한 소릴 한다고. 그건 선택이 아니라 사실 OX 문제 같은 것이다. 한다, 하지 않는다. 그럼 하지 않는다를 선택하면 되지 않냐고. 그 삶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사실 누구에게도 거스르지 않으려고 흐르는 대로 살아 이렇게 흘러왔는데 바다인 줄 알았던 도착지가 썩은 도랑이라는 걸 인정할 수 있나.
그러나 지금은 다시 인정해야 한다. 이혼을 결심했던 그날처럼 내가 도착한 곳은 썩은 도랑이었고 이제 그곳에서 나오기 위해 그동안 살아온 것보다 더 몇 배로 애써야 한다는 걸. 그곳엔 손 잡아 줄 그 누구도 없고 한 때는 이십여 년을 의지했던 그 사람도 없다는 걸. 오롯이 내가 나의 힘으로 일어나야 한다. 아등바등 그 썩은 것들에서 기어 나와 자유를 맞이했던 쇼생크 탈출의 앤디처럼 아등바등할 때다.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문득문득 내가 그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상처로 밖에 남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떡하나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 내가 이렇게 말로는 '이제 다 잊어버려야지, 미워하면 나만 손해야.'라고 하면서 순간순간 분노로 이가 꽉 깨물어져 있는 것처럼 그 사람에게 내가 추적추적한 지겨운 과거의 그림자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이런 나 자신이 역겹고 슬프다. 헤어진 지금 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아직도 난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좋은 사람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했나 보다. 그래, 괜찮아. 지금은 나에게 그 사람 역시 생각하면 힘든 날들이 먼저 떠오르는 매개체일 뿐. 김광석 님의 노래처럼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