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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지은 시가 주머니에 한가득

회사에서의 중고거래

by 꼬르따도

회사에 주니어 개발자 애들은 전부 기계식 키보드를 쓰고 있다. 자기들끼리 추천도 하고 선물도 서로 하면서 힘든 회사생활에서 애틋한 전우애를 키우고 있더라.


나도 하나 추천해줘, 해서 10만원대로 가성비 좋은 클래식 키보드 하나를 손에 얻었다. 좀 더 내 책상 위 공간이 넓었으면 하는 바람에 숫자 패드가 없는 컴팩트한 걸로 샀는데, 예쁘기도 하지만 확실히 타이핑하는 재미가 있다.


손가락에 힘이 덜 들어가고 하나 하나 키를 찍어 누르는 키감이 리드미컬해서 좋다. 데프콘이 말하는 키르가즘, 쫀득쫀득한 키감, ASMR에 버금가는 중독성 있는 타이핑하는 소리. 후배가 추천해준 것도 데프콘이 추천해준 라인업에 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시조 쓰던 양반이 환생해서 기계식 키보드로 컴퓨터에 시조를 쓴다면, 타이핑이 리드미컬해서 자신도 모르게 시조 가사에 곡을 붙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니까 지금 활동한다면 래퍼지, 래퍼. 이방원과 정몽주의 하여가와 단심가는 대표적인 디스전이라 할 수 있고. 찾아보니 실제로 이 둘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한 래퍼도 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사실, 이방원이 정몽주보다 무려 30살이 어리다. 새로운 왕조 건립을 위해 이성계에 협조하라는 이방원의 권유(하여가)를, 지금껏 몸담은 고려왕조에 대한 충점심(단심가)으로 거부한다. 몽주 형님이 새파랗게 어린 이방원을 상대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라임을 주고 받은 건 진정한 힙합 정신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정몽주의 대표 시로 음주라는 한시가 있다. 진정 풍류를 아는 힙합인이다.


飮酒(음주)

客路春風發興狂 나그네 길에 봄바람 흥이 미친 듯 일어

每逢佳處卽傾觴 좋은 곳 지날 때마다 술잔을 기울이네

還家莫愧黃金盡 집에 돌아가 돈 다 썼다 부끄러워 말라

剩得新詩滿錦囊 새로 지은 시가 비단 주머니에 가득하다네


나는 이 시를 읽자마자, 호방한 대인배의 품격을 엿볼 수 있었다. 왜냐면, 집에 돌아가 음주로 돈 다 썼다고 누구에게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내에게 말했다간 쫓겨나기 십상이다.


"여보 오늘 봄바람이 좋고, 또 좋은 벗을 만나 술 한잔 했소. 분위기 좋은 선술집에서 한잔 했더니 술값은 30만원 정도 나왔지 뭐요.

대신 술김에 좋은 글을 좀 남겼는데, 어디보자 주머니에서 시 하나 꺼내 보리다."


"나가 당장 나가!"


같은 결로, 아내 몰래 내가 은밀히 하는 취미가 하나 있다. 바로, 중고나라나 당근을 통해 중고 노트북을 사고 파는 것. 중고 노트북은 주로 Lenovo 제품을 구입한다. Lenovo 제품군은 동일한 하드웨어에 부품과 소프트웨어만 달리해서 제품을 출시하는 걸로 유명하다. 그래서 부품을 사서 사양을 업그레이드 하기도 용이하고, 더 높은 사양의 기종을 구입해도 기존 버전과 동일한 모양이니 제품을 바꿔도 티가 나지 않는다. 그렇게 노트북 부품을 사서 제품을 업그레이드하기도 하고, 가끔은 기변도 하고, 되팔기도 하는게 하나의 취미였다. 알람 설정 해놓고,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좋은 제품을 저렴하게 얻는 기쁨도 있다. 이렇게 구한 노트북이 세대 였는데, 최근에 큰누나 하나를 줬다. 예전엔 조카에게도 한 대를 주고. 그래서 두대만 유지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이런 취미를 아무도 모른다. 굳이 티도 안나니까 말하지도 않는다. (말해도 별 상관없는데, 아내에게 말 하지 않는 이유를 유부남들은 잘 알 것이다. 아내들은 어느 포인트에서 화가 나는지 잘 모르겠다. 애초에 꼬투리 잡히지 않게 입을 닫는게 상책이다.) 사실 비용도 많이 들지 않고.


키보드도 동일한 방식으로 중고나라나 당근을 통해 제품을 구하고, 팔기도 한다. 오랜 시간 회사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키보드가 좋으면 컴퓨터로 하는 작업이 조금은 더 재밌어질 수 있다.


단, 너무 심취해서 캔드릭 라마라도 된 것처럼 리듬에 맞춰 마구 두드려대다간 주변 동료들의 따가운 논총 세례를 받을 수 있으니 조심하자. 키보드를 선택할 때는 주변 동료들을 배려하여, 저소음으로 선택하는 걸로.


그리고 좀 지겨워졌다 싶으면, 당근 같은 중고시장에 알람 설정해서 더 상위 버전으로 갈아타는 것도 방법이다. 특히 판교에는 IT 종사자들이 많아, 눈독 들이고 있으면 좋은 매물을 합리적인 가격에 얻을 수도 있다. 크게 무엇인가를 구매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더라도, 내 삶에 밀접하게 영향을 미치는 물건 하나쯤은 구매하고 기변하면서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 것도, 지루한 회사생활을 견디는 하나의 방법이다.


내옆에 팀장은 오늘도 당근에서 보드게임을 득템하려고 하이에나처럼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원하는 템이 나오면,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고 퇴근하고 밤늦게 가서 구하기도 한다.


모두들 왜 그렇게 까지 하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변은 “내가 좋다는데 왜그래?”


그리고선


"아 오늘도 집으로 보드게임 택배하나 갈텐데 회사로 주소지 옮겨놓는다는 걸 깜빡했다 어쩌지"란 말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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