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러닝을 나왔습니다.
예전엔 5분 30초대로 1km를 달렸는데 지금은 6분대로 달립니다. 3km 달렸는데 지쳐서 잠시 한강변에서 쉬고 있습니다.
해질녘이라 바람도 선선하고 전날 비가 와서 미세먼지도 없고 날씨가 기가 막히네요. 사람들 표정도 밝습니다. 충동적으로 근처 사는 친구를 불러 맥주 한 잔 하고 싶지만 꾹 참을께요.
선유도 다리를 지나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포커스를 맞춰 사진을 하나 찍습니다. 이따 인스타에 달리기 기록을 남길 용도로 풍경 사진 하나 남깁니다. 편의점에서 포카리스웨트 하나 사먹으면 또 집에 돌아갈 힘이 생깁니다.
속도가 안나오는 이유를 괜히 무거운 러닝화를 신고 나온 탓을 합니다. 맨날 신던 거 신고 나오고 싶더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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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격무에 시달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또 팀장이나 파트장이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괴롭힘방지법이 막 시행되던 때였는데 그 이후 다행히 괴롭힘이 잠잠해지긴 했습니다. 제가 하던 업무에서 배제되어 새로운 업무를 맡았고 다른 팀 업무들도 관련된 업무가 있으면 저에게 할당 되었습니다. 관련 업무들 허브 역할을 하루 아침에 제가 하게 된 셈인데요. 업무 몰아주기였고 그 업무를 하느라 교육이나 컨퍼런스 심지어 워크샵에서도 제외되었습니다. 저는 욕심 껏 다시 제 본 업무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결국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일이 너무 많으면 정신적으로 굉장히 황폐해 집니다. 기력도 없고 생각도 없고 마치 일하는 기계가 된 듯한 느낌이었어요. 물론 수면부족 탓이 큽니다. 눈은 시큰거리고 허리도 아프고 입맛도 없어요.
그때 사람들이 타개책으로 대학원을 가라, 휴직을 하라는 등 언발에 오줌누기식으로 임시방편적인 해결책들을 제시했지만
뭘 다른 걸 할 엄두가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근데 그 상황이 종료된 이후에도 계속 그 피해의식에 숨었습니다. 내가 계속 이렇게 정체되다 못해 지체되어 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건 그때 팀장이랑 파트장을 잘못 만난 탓이라면서.
그게 명백한 사실은 맞지만 그 이후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건 제 잘못입니다. 상황을 타개하지 않고 관성에 머물러 그 자리에 멈춰선 건 제 탓입니다.
언젠가 만년 유망주 신드롬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가능성이 있는 유망주에 머물러 있는게 진짜 프로가 되고 성공하는 것보다는 심적으로 편하다는 의미였습니다. 죽을 동 살 동 노력해서 성공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고 만일 공식적으로 실패로 결론이 난다면 그에 따른 부담감을 이겨낼 자신이 없어 유망주라는 이름 뒤에 숨는 비겁함을 택합니다. 해볼 만큼 해봤다가 실패하는 두려움. 저도 그 마음을 너무 잘 알 것 같습니다.
나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어 나는 달리기에 재능이 있어 나는 그림에 재능이 있어.
어렸을때 어느 분야에 재능이 있다는 말 하나 정도는 들어 봤을 꺼예요.
만년 유망주에겐
재능이 있지만 그 재능은 영원히 꽃 피지 않습니다. 때론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데 그 순간이 너무 아프고 괴롭습니다. 만약 알이 안 깨진다면요? 무쇠로 만든 알 껍질이라면요?그 상황이 두렵습니다. 차라리 유망주라는 이름에 재능이 있다는 칭찬에 머물러 있는게 마음이 편합니다.
회사 생활은 그 정도의 전문성이나 재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타고난 재능이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사에서 성장하고 싶다면 어느 정도의 노력은 필요합니다. 사람들 비위도 맞춰줘야 하고 내 능력도 어필해야 하고 맨날 하던 일 말고 혁신적인 업무도 선보이면 좋고.
그 노력들을, 이미 늦었다, 팀장 잘못난 탓에 다 틀렸다고 그 핑계 뒤에 오래 숨어있었습니다. 사실은 제가 충분히 노력했다가 실패할까봐 두려워서 였습니다. 한 회사에서 세번이나 진급에 떨어졌습니다. 두번 떨어지고 돈먹고 나간 팀장의 베프이자 빽으로 기획팀에 오신 팀장이 제 팀장이 되었습니다. 진급하고 싶으면 관리과장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작년에도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사실 관리과장이 팀 내 모든 잡무를 담당한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제가 3년째 하고 있는데 또 하라니요?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 핑계로 또 얼마나 압박하려구요?또 얼마나 부려먹으려구요? 그렇게 해놓고 또 진급 떨어지면 얼마나 억울하게요? 진급하려면 해야 한다는데 그 업무를 안 한 후배들은 척척 진급을 한 이유가 있을꺼 아닌가요? 저는 처음으로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또 진급에 떨어졌습니다. 관리과장을 안해서 그런 건 아닐꺼예요. 태도도 문제가 있었을테고 그러면 업무에도 진심이 안담기겠죠.
구매팀에서 빽으로 기획팀으로 온 그 팀장은 어떻게 됐을까요? 딱 1년 팀장하고 다시 구매팀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될 지 알았습니다. 그 분은 그냥 허수아비였을 뿐이예요. 그분에게 인사권이 있지도 않고 자기 사람을 챙겨줄 그런 사람도 아닙니다. 비겁한 사람인 건 진즉 알고 있었어요. 그렇다고 해도 그 사람에게 예의를 지켰어야 했는데 그냥 그 상황이 너무 ㅈ같았습니다. 실제로 어떻게 제가 극복할 수 있는 그런 상황도 아닐 뿐더러 일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 전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건 바로 그 괴롭힘 집단에 새로 온 그 팀장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고 저는 분명히 피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분의 비겁한 면모를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타개책으로 회사 합병에 따른 전적을 거부하고 막다른 길에 다다라 이직을 택했습니다. 직급이 없는 아이티 회사로 왔습니다. 진급을 못하고 와서 급여에서 피해를 받긴 했지만 이직을 하고서야 그 피해의식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나름 업무에서 성취를 이뤘고 일 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너무 늦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알을 깨고 나와 다행입니다.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올 상황이 있었지만 애써 여러 이유로 무시하고 좋은 나이를 지나 사면초가에 다다르고 중년에 이르러서야 적극적으로 움직였습니다.
신발이 무겁지만 집에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속도가 안나온 건 무거운 신발 탓이 아니라 그동안 러닝을 소홀히 한 제 잘못이겠죠
핑계에 숨지 않겠습니다. 늦은 건 없어요. 지금 충분히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고 더 해낼 에너지도 있습니다.
사실 내일 출근길이 기다려집니다. (무두절이기도 합니다ㅎㅎ)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습니다. 회사 가고 싶은 날이라니.
날씨가 좋네요. 사람들 표정도 밝습니다. 다시 러닝앱을 켜고 달릴 준비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