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이렇게 피고 진다 : 연작 (7)
가을 햇살,
들판 위에 금빛 물결 바람 속에 사과 향이 스며든다
붉게 빛나는 작은 별 하나
손바닥에 올리면 여름의 기억이 살결로 스민다
한입 베어 물자
차가운 새벽 같은 신맛이 혀끝을 번개처럼 스치고
곧이어 햇살에 익은 단맛이 풍부한 육즙으로 목을 적신다
신맛은 나를 깨우고 단맛은 나를 위로하며
단단한 육질 속에 견뎌낸 계절이 잠들어 있다
사과 한 알 속에
봄의 싹과 여름의 폭풍우와 가을의 햇살이 겹겹이 겹쳐
작은 사랑을 이룬다
이 붉은 과일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다시 돌아올 가을을 조용히 예언하는 가을 햇살의 목소리다
내가 살아가는 매일매일 속에서 나누는 그녀와의 사랑은 가을의 햇사과와 닮았다.
가을 햇살이 한낮의 들판 위로 비스듬히 쏟아진다. 빛은 따뜻하지만 그 속에는 서늘한 가을바람의 기운이 섞여 있다. 들판을 스치는 바람마다, 익은 사과향이 가볍게 흩날린다. 그 향은 시큼하고 달콤하며, 흙냄새와 햇살 냄새가 함께 묻어 있다.
나는 막 따낸 햇사과를 손에 쥔다. 껍질은 얇고 팽팽하며, 투명한 붉은빛은 햇살을 머금고 있다. 그 붉음에는 하루 종일 햇빛을 마신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는 따스한 숨결로 남아 있다. 표면에는 아직 새벽 이슬이 매달려 있고, 햇살이 비추자 물방울들이 금빛으로 반짝인다. 그 순간, 내 손바닥 위의 사과는 작은 별처럼 빛나며, 계절의 시간을 압축한 듯 묵직하게 느껴진다. 손끝에 전해지는 단단한 육질의 감촉은 오랜 시간 동안 땅속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견뎌온 나무의 숨결 같다.
한입 베어 문다. 얇은 껍질이 ‘탁’ 하고 입안에서 부서진다. 첫맛은 서늘한 새벽의 공기처럼 매섭고 찌릿한 신맛으로 혀끝을 깨운다. 안개 낀 새벽 들판을 맨발로 밟을 때 스며드는 냉기처럼, 혀끝에서부터 척추를 따라 전율처럼 온몸으로 번져 간다. 그리고 신맛의 차가운 냉기가 몸속 깊은 폐까지 스며들며 깊은 잠에서 순간 나를 깨어나게 한다.
온몸이 잠시 숨을 멈춘다. 그 찰나의 냉기가 지나가자 곧이어 따뜻한 달콤함의 단맛이 밀려온다. 혀끝의 시림이 천천히 녹아내리며 사라지고 이어 꿀처럼 묵직한 단맛이 입안 구석구석으로 번져온다.
뜨거운 여름의 태양빛을 머금고 익어온 시간이, 한입의 맛으로 입안에서 터져 나온다. 그 단맛 속에는 수없이 내리쬔 사랑의 빛의 조각들이 녹아 있으며, 그 모든 뜨겁고 강렬했던 여름의 시간이 육즙으로 바뀌어 내 입 안에서 폭포처럼 흘러내린다.
사과 한입의 풍부한 육즙이 나의 목구멍을 적실 때, 나는 비로소 계절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깨닫는다. 시큼한 바람이 단맛의 여운 속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가을의 고요가 찾아온다.
그 맛 속에는 겨우내 얼어붙은 땅을 뚫고 솟아오른 봄의 여린 싹이 아직도 숨 쉬는 듯하고, 장마의 폭우를 견딘 잎사귀의 촉촉함이 기억처럼 살아난다. 그리고 한낮의 뜨거운 빛이 이 한 알에 스며, 햇살의 온기와 여름의 힘이 육즙으로 녹아 있다. 이렇게 이 한 알의 사과는 그 모든 계절의 숨결을 품고 있다.
햇사과의 단단한 육질은 우리의 사랑과 닮았다. 쉽게 무르지 않고, 꺾이지 않으며, 꼭꼭 다져진 마음처럼 단단하다. 한 해 동안 우리가 겪은 폭풍우와 무더위, 그리고 긴 장마가 이 작은 열매 안에 새겨져 있다. 마치 너와 내가 견뎌낸 날들의 온도와 질감이 이 과육 속에 각인된 것처럼.
그 한입은 또 다른 사랑의 시작이다. 그 단단함을 씹을수록, 단단함 속에서 시간이 남긴 부드러움이 혀와 손끝으로 전달되며, 너와 나는 그 시간의 사랑을 함께 삼킨다. 새로운 사랑의 씨앗은 입 안에서 미세하게 움트고, 과일 속 작은 씨앗이 햇빛과 비를 기다리듯, 우리의 사랑도 또 다른 계절을 잉태한다.
남은 오후, 나는 햇살이 기울어가는 들판을 바라본다. 해는 점점 낮아지고 빛줄기는 길게 늘어져 들판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풀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은 이미 여름의 열기는 잃었지만, 여전히 따뜻하다. 사과를 다 먹고 남은 씨앗 하나를 조심스레 손바닥에 올려본다. 작고 단단한 그 씨앗 속에는 또 다른 약속이 잠들어 있다. 신맛은 이미 사라지고, 단맛도 옅어졌지만, 입안에는 여전히 그 풍미가 은근하게 남아 있다. 그것은 계절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 기억처럼 마음속에 오래도록 머문다.
가을 햇살은 사과의 붉은 껍질을 더욱 깊게 물들이며, 나의 하루 또한 그 빛 속에 잠긴다. 나는 숨을 고르며, 그렇게 사과를 먹으며 그녀와 나 사이의 사랑을 새긴다.
신맛은 순간 나를 깨우고, 단맛은 오래도록 나를 위로한다. 단단하게 견디고, 시고 달게 웃고 울며, 마침내 한 해의 햇살을 품은 채 우리의 사랑도 익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