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성과 구원에 대하여...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1)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만 알게 된다" (2)
이 두 문장은 이성의 한계가 멈춰 선 논리를 넘어선 지점에서 본질(?)로 가기 위한 맹목적 믿음의 선행성을 강조한 말이다.
하나는 예술이고 하나는 종교적 신앙이지만 둘 다 논리적 이성의 지점이 포착하지 못하는 틈새에서 그 지점 너머를 가고자 하는, 가야 하는 곳에 대한 열망의 맹목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나는 채식주의자 3부작에서 "맹목성"을 통하여 인간, 예술, 사랑 그리고 기존의 구원이 어떻게 무너지고 형태를 잃어버리는지를 바라본다.
소설은 1부 채식주의자에서 아편적 맹목성 속에서 영혜의 채식과 도피를,
2부 몽고반점에서는 예술적 맹목성 속에 형부의 예술과 추락을 담아낸다.
마지막 3부 나무 불꽃에서는 사랑의 맹목성을 통해 그 현실의 소멸과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을 그리고 있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영혜의 초월적 열망, 형부의 후회, 인혜의 연민은 모두 불완전하고 맹목적으로 보이며,
이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소설 전체에 걸쳐서 영혜는 자신의 몸을 초월적인 존재로 변화시키고자 하지만, 그 과정은 그녀를 무기력하고 고립된 상태로 내몬다. 이 과정은 꼭 아편이 우리의 의식을 무력하게 만들어 무한한 망각 속에 우리를 가두는 것과 닮아 보이며 그래서 나는 이것을 아편적 맹목성/선택이라 부른다.
아편이 현실과 단절된 도취를 제공하듯, 채식을 고집하고 나무가 되고자 하는 영혜의 열망은 의식은 흐릿하고 육체는 무력한 상태로 만들어 현실을 도피, 외면, 그리고 단절 속에서 평온과 소멸을 가져온다.
영혜의 선택은 현실을 완전히 부정하며 고립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며 맹목적 초월은 구원이 아니라 소멸로 귀결되고 나에게는 이러한 영혜의 모든 행위가 아편적 맹목성의 전형으로 보인다.
결국, 영혜와 형부, 인혜의 맹목성 속에서 그들의 선택과 열망은 채식과 도피, 그리고 추락으로 이어지며,
그 끝은 구원이 아닌 소멸로 귀결된다.
이렇게 인물들 모두가 '맹목성'속에서 길을 잃고 무너지는 이야기는 구원이 부재한 세계를 암시하며 작가 한강은 인간이 자신을 초월하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이 점에서 작가는 구원을 부정하는 비관주의자로 읽힌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채식주의자에서 작가는 묻는다.
무너진 후에 남는 것들은 무엇인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도, 무너진 자리에서도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영혜가 인간으로서의 경계를 벗어나기 위해 육체를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나무가 되고 싶다는 열망은 무력하게 보이지만, 그 속에는 인간 존재를 넘어 자연과 융합하려는 가장 근본적인 욕망이 담겨 있다.
형부는 자신의 욕망과 예술적 표현 속에서 추락하면서 묻는다. "예술이 실패할 때조차, 우리는 그 속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동생을 구하지 못한 인혜의 연민, 사랑은 묻는다. "구원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현실에서 그 대답은, 인간(가족이 아닌)의 연약함과 그 사이에 흐르는 연민, 그 속의 생명력이라는 본질적 감각에서 찾을 수 있다고 작가는 보여준다.
한강은 연민 속의 기존의 구원은 부정하면서도 기존의 구원이란 말로 포착되지 않는 살아있는 '생명의 떨림' 같은 작은 '잔여의 구원'을 남겨둔다.
"나는 잎이 되고 싶었다."는 영혜의 이 열망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인간이 가지는 가장 원초적인 희망이다.
영혜의 나무가 되고픈 열망이 새로운 구원에 대한 열망이라면,
모든 것을 잃어가는 순간에도 끝까지 동생의 손을 붙들고 있는 인혜의 모습은 구원이 없는 세상에서의 무력한 '구원의 흔적'으로 남는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의 구원이 기존의 틀 안에서 이뤄질 수 없음을 직시하고, 그 너머를 묻는 태도로 읽을 수 있다. 그녀는 구원이 단순한 해결이나 위안이 아니며, 고통과 소멸의 과정에서도 인간성을 재발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것은 기존의 구원 개념이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주며, 구원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인간에게 왜 필요한지를 근본적으로 다시 질문하게 하기도 한다.
신은 침묵하고, 사랑은 파괴적이며, 예술은 욕망과 혼돈 속으로 가라앉는다.
영혜가 고통 속에서 육체의 경계를 넘으려 할 때,
형부가 자신의 예술적 탐욕을 직면할 때,
인혜가 동생의 고통 앞에서 무력하게 눈물을 흘릴 때,
그들은 모두 구원을 잃어버린 자리에서 새로운 질문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질문은 결코 완벽한 답을 찾지 못한다.
고통이 없다면, 질문도 없다. 무너짐이 없다면, 응시도 없다.
한강의 작품은 구원이 사라진 세계에서도 인간이 스스로에게 묻고, 서로를 바라보며,
고통의 가장 깊은 곳에서조차 생명의 숨결을 느끼는 순간을 포착한다.
구원의 잔해 속에서 태어나는 성찰이다.
모든 것이 무너진 뒤의 '잔여-남은 것들'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나 초월이 아니라, 무너진 세계와 고통의 잔해 속에서 발견되는 작은 생명의 조각, 관계의 파편, 그리고 존재의 떨림이다.
그것은 구원의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그 실패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미세한 가능성이다.
그것은 파괴와 실패 이후에 남는 미세한 흔적들, 인간이 고통 속에서 발견하는 최소한의 의미와 생명의 떨림이며, 비가 그친 후 흙냄새 속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풀잎과 같다.
인간의 실패와 고통 속에서도, 생명은 끊임없이 피어나려는 몸짓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소멸 속에서도 살아남는 작은 불씨이며, 고통 속에서도 인간성을 증명하는 가장 작고 약한 흔적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믿음이 없이는 이해도 없다. 왜냐하면 이해란 단순히 알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과 진리에 접촉하려는 열망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왜 영혜는 크게 절망적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절망하며, 그래서 그녀의 절망은 맹목적으로 보인다"라는 나의 질문은 결국은 부질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 (1) 이 말은 조선 정조 때 문인 유한준의 명문을 유홍준 교수가 약간 고쳐 쓴 것이다.
원 뜻은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이다.
* (2) "Fides quaerens intellectum / 믿음은 이해를 추구한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
둘 다 논리적 이성의 한계에 멈춰 선 지점에서 맹목적 믿음의 선행성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