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저녁의 기억
겨울의 저녁이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나는 툇마루에 그대로 앉아 저물어 가는 빛을 바라본다
떠오르던 아침 햇살은 부드럽고 포근했는데
저물어 가는 저녁 햇살은 냉랭하고 날카롭다.
마당 끝에 선 감나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한 홍시는 빛을 잃고,
쪼글쪼글한 껍질 속으로 끌어안은 겨울바람에 한 해의 끝자락이 선명해진다.
겨울의 냉기를 머금은 그것은 더 이상 여름날의 태양을 담고 있지 않으며,
차갑고 질긴 껍질 속 굳어져 버린 속살은 묵묵히 한 해를 새겨 놓는다.
아궁이 앞에 웅크린 채 불쏘시개를 하나씩 넣는다.
마른 가지가 타오르기 시작하며 틱틱거리는 소리가 공간을 메운다.
얇은 불꽃이 허공으로 몸을 뻗으며 그 위에 굵은 장작을 얹는다
장작은 마지막 몸부림의 불길로 몸을 비틀며 한해의 온갖 기억과 흔적들을 삼킨다.
겨울 하늘에 번지는 거무스름한 연기가 굴뚝을 타고 하늘로 흩어졌지만
그 냄새는 공기 속에 잔뜩 배어 이 겨울의 쓸쓸함이 내 마음 한 켠에 끈질기게 머물고 있다.
벌겋게 타오르던 장작들은 이제는 이름도 형체도 남김없이 태워야 한다.
재로 남아야 한다.
어머니는 말했다.
"이 재도 소용이 있어. 뒷마당 꽃밭에 뿌리면 새싹이 더 잘 자라지."
회색빛 잿더미 속에는 새봄의 생명을 품은 싹들이 있다.
이 잿빛 흔적들은 흙 속으로 스며들어, 파릇한 싹들에 바쳐져 대지위에 새순을 밀어 올릴 것이다.
나는 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
나는 겨울의 차가움을 견디며,
불길 속에 사라지는 것들을 지켜보며 마음속 어딘가에서 깊은 허무감을 느낀다.
사라지는 것, 떠나가는 것, 내 손에서 흩어지는 것들은 결국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앉았던 툇마루, 산 너머로 저물던 해,
그리고 어머니의 손길은 더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속에 남아 있다.
거리의 불빛은 가득하지만 그 빛은 내 마음을 덥히지 못한다.
고향의 겨울에는 모든 것이 단순하고 투명했지만,
지금의 겨울은 너무 복잡하고 무겁다.
툇마루에 앉아 바라보던 산자락의 끝, 서늘한 바람, 장작 타는 냄새,
그리고 저녁 어스름 속에서 느꼈던 겨울의 따스함은 이제 내게 더 이상 닿지 않는다.
저녁의 찬 공기를 품은 나의 감정은 이렇게 늙어가고 있지만,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나를 감싸며 장작의 불꽃처럼 내 마음속 어딘가를 여전히 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