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8/토/비
헐, 125문제나 나온다고? 비 내리는 토요일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대전의 모 여중 후관 3층 10 고사장. 창가 두 번째 자리. 정말 오랜만에 시험이란 건 치른다.
시험 하루 전까지 봐야 할 내용이 한참 남았다. 계획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겠냐마는 계획대로라면 난 어제 마지막으로 기출문제 3회분을 훑어보며 마무리를 하고 컨디션 관리를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어야 했다. 현실은. 새벽 3시까지 시험 범위 마지막 부분을 다 못 보고 찝찝하게 눈을 붙였다. 오랜만이다. 공부하다 잠든 건, 책 보다 새벽에 잠든 건.
9시까지 입실해야 하고, 집에서 시험장까지는 한 시간 정도가 걸리고, 주차장이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안내문은 받아놓은 상태. 가족 모두 조기 기상. 7시 30분에 아내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선 내가 졸고, 뒷좌석에서는 아들이 잤다. 시험은 11시에 끝날 예정이니 아내는 날 고사장 정문에 내려주고 아들과 함께 성심당에서 빵을 사 오겠단다. 빵. 어째 좀 불길한 느낌적인 느낌. 시험장에는 말 그대로 남녀노소가 다 모였다. 20대로 보이는 남녀로부터 나보다 한참 형님, 누님으로 보이는 분들까지. 새롭고 신선한 세상이다.
다행이다. 총 75문제.(모의고사를 풀어보지 못한 티가 여기서부터 난다) 문제의 난이도는… 상…상 이상이다.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시험지를 넘기며 답안지에 연필로 답을 체크한다. 모르는 문제는 건너뛰면서 75번을 찍고, 역으로 페이지를 넘기면서 컴퓨터용 수성사인펜으로 최종 마킹을 하며 1번으로 돌아오니, 젊은, 아니 나보다 어린 친구들은 벌써 교실을 나갔고, 시험종료 5분 전. 견딜만한 시간이었다.
학창 시절 시험은 설렘보다는 늘 두려움이었다. 잘 준비된 채로 치른 시험은 손에 꼽을 정도고, 늘 아쉬움이 남고 결과를 회피하고 싶었던 거 같다. 사회로 던져진 후 그 정도와 양상은 많이 바뀌었지만 그 결과가 직업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늘 부담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오랜만에 정해진 시간에 몰두해서 문제를 읽고 답을 찾으면서 상쾌함을 느꼈다. 아는 문제가 나와서가 아니다. 답을 모르겠는 문제의 번호에 브이 표시를 하고 건너뛰면서도 불쾌한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답안지를 제출하고 본관 현관 계단에 앉아 아내와 아들을 기다린다. 빗줄기는 더 강해졌다 조금씩 잦아든다. 음악이 필요한데, 이어폰을 챙겨 오지 않았다. 그냥 빗소리를 들으며 교정과 건물들을 둘러본다. 한참 꿈 많고 즐거워야 할 여학생들의 학교 건물이 참 멋없다. 하지만 오전의 시험은 충분히 낭만적이었다. 비사 잦아들고 아내의 하얀 차가 보인다.
삶은 나서 죽을 때까지 시험의 연속이라고. 그래 어쩌면 우린 매일매일 다양한 방법과 난이도로 시험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쉬엄쉬엄 준비해서 가볍게 응시하자. 오늘의 1차를 통과해야 2차 시험을 또 볼 수 있는데, 결과가 안 좋아도 다시 시험을 치러야겠다. 운이 좋아서 자격증을 얻게 되면, 다음에 머릿속으로 열 번은 치렀을 지게차 자격증에 도전해야겠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영어시험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내가 싸 온 김밥을 먹으며 집으로 향한다. 아무래도 수면부족으로 머리가 좀 이상해진 거 같다. 60점 합격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