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필 #사진 #역사 #흑역사 #자력표 #바디프로필
'이 색히 완전 아스팔트네?'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군 일 년 선배가 내 자력표를 보고 뱉은 말이다.
임관, 보병학교 초등군사반, 육군 제9보병사단 29연대 전투지원소대장, (동부대) 사단장 전속부관, (동부대) 28연대 2대대 작전항공장교, 보병학교 고등군사교육반, 특전사 흑표부대, 수방사 지휘통제실 상황장교, 국방대학교 국방관리학(리더십) 석사, 학생중앙군사학교 102학군단 교관... 까지 진행된 시점이었다.
임관부터 소령 계급까지 수도권과 굵직한(?) 부대 위주로 돌아다닌 경력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덧붙인 농반진반 질문. '아버지가 장군이시냐?'
자력(資歷). 자격과 경력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니 군생활 프로필이다. 중간중간 내가 넣고 싶었던 '장교영어반', '이라크 자이툰부대 1진', 그리고 해외유학과 리더십 박사과정은 끝내 넣을 수 없었지만, 이 정도면 깔끔하고 시쳇말로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프로필. 반면, 전역 후 프로필은 보잘것없다. 영업직 안에도 직급이 있고, 실적에 따라 올라갈 계층이 있다. 10여 년의 시간 동안 난 만년대리 정도였다. 직업적 철학이 어쩌고, 업의 본질이 저쩌고, 합리화하며 버텼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영업조직에서 난 딱 대리만큼의 역량이 아니었나 싶다. 뭐 좀 내세울 게 없나 하고 주워 모아둔 프로필은 팬데믹 시기 실직과 함께 지워버렸다. 껍데기는 가라! 다시 무언가를 쌓아 가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아무도 아니고 싶었다. 아니지, 아무 거도 아닌 걸로 살고 있어서, 살아갈 거 같았다. 과거 따위. 프로필 따위.
우연한 기회에 바디프로필을 찍었다. PD 친구의 주선으로 모방송사 건강 다큐 프로그램에 일반인 참가자로 참가했다. 두 달간, 주 2회, 회당 4시간 정도 다른 지원자들과 함께 전문 트레이너들에 의한 고강도 운동 프로그램과 식단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중간중간 이런저런 측정을 통해 데이터를 제공하고, 마지막에 따로 또 같이 바디프로필을 찍었다.
어쩌다 바디프로필. 벼르고 찍으려는 열정은 없었지만, 유행처럼 번진 남의 바디프로필을 보면 부러울게 분명했다. 친구 덕에 몸뚱이와 시간만 투자해서 하나 건졌다. 바디프로필은 프로필과는 조금 달랐다. 차원이 다른 고된 육체노동과 불규칙한 식사, 운동할 시간과 의지도 없던 시절. 남의 일로 여겼던 저질체력에 몸무게는 늘고 배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사진을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 논리가 아닌 감정적 차원의 이유가 컸지만, 나름 논리적 해석이 가능했다. 프로필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이자, 향수였지만, 바디프로필은 다시 닮아갈 수 있는 미래, 돌아갈 수 있는 목표로 느껴졌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여유시간이 생겼다. 다친 허리 재활을 목적으로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뱃살이 들어갔다. 조금씩 달리는 날 수가 늘었다. 조금씩 턱걸이 수가 늘었다. 조금씩 자신감이 생겼다.
다시 프사를 찍을 거다. 바디프로필로. 아들과 함께. 다시 몸을 만들 거다. 다시 프로필을 쓸 거다. 새롭게. 몇 줄이나 남기고 갈지 모르지만. 다시 전과는 사뭇 다른 프로필을 쓸 거다. 하늘나라 갈 때 멋진 이력서 들고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