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형 여행자들

러시아 하바롭스크

by 카렌

인류의 조상들은 생계형 여행자였다. 먹이를 찾아 이곳저곳 헤매는 사람들이었다. 우연한 발견으로 농사짓는 법을 알게 되었다. 여행을 멈추기 시작했다. 무리를 이루었다. 무리를 이루어 농사를 지었다. 생계형 여행자일 때 우리 조상들의 영양 상태가 더 좋았다는 연구가 있다. 쌀이나 밀만 먹지 않고 이것저것 고르게 먹었다고 한다. 그러면 왜 우리는 계속 생계형 여행자로 살 수 없었을까. 농사를 거부하고 왜 계속 여행을 하지 않았을까? 내가 묻자 제이가 대답했다. “여행자들은 소수여서 그래.” 제이의 말을 정리해보면 이런 거였다. 무리를 이룬 다수의 사람들이 소수의 사람들을 사냥 했다. 노예로 만들어 대신 농사를 짓게 했다. 사람들은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다수가 되고자 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멈추고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자유를 빼앗겼지만 훨씬 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악착같이 남들 같아지려고 우리가 노력하는 것은 생계형 여행자의 운명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수는 다수에게 모든 걸 빼앗기게 되어 있는 구조다. 그 시절이 아무리 좋아도 이제 돌아갈 수가 없다.


일부러 역에서 먼 곳에 내렸다. 전날 비로비잔 행 기차표를 끊고 택시를 타고 박물관까지 간 적이 있는데 가는 길에 꽤 괜찮아 보이는 공원을 발견했다. 하바롭스크 역에서 아무르 전망대까지 직선으로 공원이 이어져 있고 공원 속에는 그 두 곳을 잇는 산책로가 있었다. 대략 3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직선으로 그렇게 길게 이어지는 공원을 한국에서는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에는 많다. 러시아는 공원의 나라고 하바롭스크의 명물 중 하나는 이런 공원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명물을 제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택시어플로 공원 어딘가를 찍은 후 드라이버를 불렀다. 그리고 그곳에 하차. 우리는 역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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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는 구경거리가 많았다. 아이들 데리고 산책을 나온 가족은 물론이고 꽃을 파는 노인, 과일을 파는 노인. 반려동물을 파는 남자, 아이스크림을 팔러 나온 여자 등등. 공원 밖으로는 큰 시장이 몇 군데 보였다. 우리는 그 곳 중 하나를 구경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곳이 중앙시장이었다. 장사꾼들 중에는 고려인들이 있어서 김치 등을 포함해 한국 음식을 손쉽고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할바’를 몇 개 샀다.


점심은 역 근처에 있는 마트에서 제이가 장을 봐왔다. 샌드위치와 크림빵과 요플레와 부침개 같은 것. 역을 바라보며 마트 입구 앞에 앉아 먹었다. 제이가 이런 건 좀 곤란하지 않냐는 눈치를 주었다. “이렇게 먹는 것도 괜찮아. 우린 여행자잖아. 여행자는 먹지 못할 장소가 없어.” 나는 그렇게 말했다.


기차는 도착해 있었다. 한 시간 가량 하바롭스크에 정차하고 모스크바로 떠날 예정이었다. 우리는 비로비잔에서 내릴 예정이었다. 플랫폼에 나가 기차를 바라보자 옛 사람들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때 블라디보스토크의 집에서 잠자다 끌려 나온 한인들을 태운 기차가 이 역에 섰었다. 그들은 아무렇게나 분류되고 아무렇게나 기차에 실렸다. 손기정이 타고 갔던 그 기차처럼 화물칸이었다. 기차가 서자 오랜만에 사람들은 햇볕을 쬐기 위해 이 플랫폼으로 나왔다. 삼엄한 감시 속에 그들은 입고 있던 옷을 털었다. 그러자 옷에서 이가 우루루 쏟아졌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의 몸에 붙어 악착같이 피를 빨고 있었다.화물 객차 하나당 30명 이상씩 탔다고 한다. 비위생적 환경 속에서 그들은 40여 일간을 달렸다. 몸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프다고 말한 사람들은 치료를 받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중간 역에서 내렸지만 돌아온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아파도 가족 옆에서 죽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다. 고려인들은 대표를 뽑아 이렇게 항의했다고 한다. “스탈린 동지가 우리에게 이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소련 건설을 위해 큰 공을 세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밤에 끌려 나가 돌아오지 못했다. “모두 배신을 당했어. 혁명에 동참한 사람들은 대개 다 그렇게 죽더라고.” 그때의 이야기를 잠시 들려준 다음 의자에 앉은 제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나는 자리를 피해 화장실로 갔다. 기차표를 보여주면 화장실은 공짜였다.


1863년 연해주로 넘어간 13명이 고려인의 시작이었다. 나중에 그들은 개척리라는 마을도 만들고 신한촌이라는 마을도 만들고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소수였다. 나는 최초의 고려인들이 생계형 여행자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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