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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창고 Jul 30. 2021

집으로 가는 길

퇴근길 풍경

 어둠이 지는 거리에 가로등이 켜졌다. 잠자리 날개 모양의 LED 가로등은 작은 구슬을 여러 개 합친 것 같다. 꼬리를 무는 차들, 8차선 도로는 빈틈이 없다. 관문사거리에서 사당 사거리까지 약 4킬로 구간은 아침저녁으로 언제나 막힌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같은 듯 늘 다르다. 차가 덜 막히는 아침에 대충 보였던 것들이 저녁에는 세세하게 들어온다.


 어제와 같거나 비슷한 풍경들이 사계절을 만들어낸다. 어제와 비슷한 내가 아이에서 어른이 되고 주름살이 늘어나는 것처럼,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의 어느 지점에서 계절은 확연히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현재는 과거로 흘러가고, 내일의 시간은 예고 없이 몰려온다.

 익숙한 이 길과 작별할 시간도 머지않았다. 퇴직이 가까워 오는 것이다.     


 인적이 드문 거리에 적당히 구부러져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양버즘나무는 언제나 매력적이다. 이른 봄 노르스름하게 오르는 새싹은 죽은 듯 엎드려 있던 겨울의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한 여름의 무성한 잎들은 더위에 지친 마음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손바닥만 한 넓은 잎들이 황갈색으로 변하면서 맨바닥에 떨어져 스르륵 뭉개질 때는 살아있는 것들의 한 살이가 끝나가는 고통이 느껴지며, 차가운 바람 속에 맨살을 드러낸 나무의 허옇고 미끈한 속살은 원숙한 여인의 농염한 몸짓과도 같은 묘한 매력을 내뿜는다.

 신호등이나 거리의 상호를 방해하지 않도록 뭉텅 잘려 굵은 몸뚱이에 어울리지 않은 잔가지가 본때 없이 얹힌 도심 속의 나무가 아니라 뒤편 얕은 숲을 배경으로 인위적으로 손대지 않은 자연스러움 때문에 더 돋보인다. 어둑한 하늘을 떠받치듯 있는 나뭇가지 끝에 간혹 둥근달이 걸리거나 별이 매달린다.     


 자연은 서로에게 손짓하며 다정한데 뒤따라오는 저 차의 헤드라이트는 자주 낯설다. 언제부턴가 자동차의 전조등은 창백하고 날카로운 표정으로 달려든다. 유백색의 둥글고 부드러운 불빛은 점점 밀려나고 짐승의 부라린 눈동자 같은 불빛들이 거리를 점령해간다. 깻잎 한 장의 차간 거리는 저 사나운 불빛으로 인해 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넌 것처럼 점점 더 타인의 거리가 되었다.

날카로운 이빨 같고, 부릅뜬 야수 같은 전조등이 곁을 스칠 때마다 배타적인 도회 생활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독사의 대가리처럼 적의를 보이며 청백의 불빛을 내지르는 저 차의 주인은 오늘 저녁 와인 잔을 곁들이며 고급스러운 치즈 한 조각과 싱싱한 샐러드로 연인과의 저녁식사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알고 보면 다 이해가 가고 알고 보면 다 좋은 사람들인데 우리는 서로를 알기가 어렵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나와 다른 타인을 가르고 밀어내며 공기가 흐를 공간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바짝 차를 갔다 대는 뒤차의 주인은 오늘 저녁 가족들에게 ‘언제나, 어디서나,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밥상머리 교육을 할지도 모른다.   


 요일제를 피하고 출퇴근용으로 편리하다는 이유로 경차를 가지고 다닐 때 나는 늘 뒤차와 부딪칠 것 같은 두려움을 가졌다. 뒤차의 압박에 대한 심리적 방어로 앞차와의 간격을 벌리면 이번에는 잽싸게 차선을 변경하며 끼어든 차로 다시 움찔 놀란다. 그렇게 끼어든 차가 다시 본래의 노선으로 갈 때 나는 그 차의 주인이 무슨 생각으로 끼어들었는지 가끔 궁금해졌다. 촘촘한 공간에서 약간 벌려져 있는 공간이 그에겐 불편했던 걸까? 아니면 비어있는 공간만 보면 채워야 하는 훈련이 정체된 도시에서 본능처럼 길들여졌던 것일까.    


  어느덧 사당사거리가 가까워졌다. 숲은 사라지고 양 옆의 건물에서 튕겨 나오는 불빛과 백색의 전조등, 붉은 후미등으로 거리는 점점 빛의 홍수가 되어 간다.

이 도로 아래 깊고 어둔 땅속에 지하철이 다닌다. 지하철 입구에서 사람들이 연이어 들어가고 나온다. 누에가 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듯 이 애벌레처럼 생긴 거대한 물체는 역마다 사람들을 토했다가 받아들인다.

어떤 이는 집으로, 누군가는 약속 장소로, 어느 사람은 또 다른 목적으로 쉼 없이 움직인다. 약속시간에 딱 맞추기는 지하철이 더 좋지만 그럼에도 차를 몰고 나서는 것은 내 공간의 익숙함과 자유로움 뭐 이런 이유라고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사실 그랬다. 막히는 길이지만 차 안은 온전한 나의 공간이다. 라디오나 CD, 블루투스 음악을 들으면서,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다듬고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펴기에 이만한 공간과 시간이 없다. 간단하게는 찬거리에 대한 생각부터 가족들과의 일상사, 미래의 계획까지 성을 쌓았다 헐었다 한다. 이 시간은 공적 공간 속에서 잊고 있었던 나의 사적 공간을 연결하는 좋은 매개가 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지체되는 시간들 속에서 발버둥을 쳤지만 이제는 느긋하게 나만의 시간을 즐긴다.    


 어느새 지하주차장에 왔다. 집안으로 들어서서 옷을 벗고 샤워를 한다. 뽀글거리는 비누 거품과 함께 하루의 피로는 떨어져 나가고 탄력 잃은 얼굴에 흐르는 물방울은 생기를 준다. 오늘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늦다. 가족이 다 함께 모여 밥을 먹은 게 언제였더라? 막내가 들어오는 모양이다. 현관의 비밀번호가 춤추듯이 따닥거 린다. 남편은 오늘 약속이 있다고 했고, 둘째도 늦을 모양이다.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면서 소파에 푹 기댄다. 기분 좋게 하루가 간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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