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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Sep 30. 2019

자두의 한해는 잼이 되었네

요 작은 병에 잼을 담아 산에 갈 때 빵과 함께 챙겨간다.


냉장고를 여닫을 때마다 그것과 신경전을 벌였다. 선생님한테 골이 난 여중생처럼 삐죽하고 새초롬한 얼굴이었다가 서걱서걱 물기가 빠지더니 거무스름하게 본색을 잃어갔다. 기껏해야 일년에 다섯 알도 먹지 않는다고 손을 저었지만 친구는 열두개들이 한 팩을 윤봉길의사가 도시락폭탄 던지듯 재빨리 내 카트에 담았었다. 과일 좀 가리지 말고 먹어라 좀. 친구의 잔소리를 흘려들으며 둥그막하게 들어앉은 자두알을 바라보았다. 저걸 다 먹을 수 있을까. 사실 신경전은 그때부터였다.


눈에 모이면 먹겠지 싶어 한 알을 꺼내 공부방으로 가져왔다. '하루에 과일 한 움큼'이라는 친구와의 약속을 지켜보자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굳이 눈앞에 가져다놓았다는 것은 그렇게하지 않고서는 자발적으로 먹을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다. 며칠이 지나는 동안 자두는 달력과 명함꽂이와 탁상시계처럼 정물화돼갔다. 그러던 어느날 탐스런 시선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채 과육을 잃어가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입에서 비명같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아...! 그것은 거죽만 남아 빼들빼들 공기 빠진 고무공처럼 납작한 형태로 생생한 슬픔을 웅변하고 있었다. 뭐랄까. 너무 슬퍼서 이미 자두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마음없는 관계가 그러하듯 친밀하지만 완고한 거리감 만큼 슬픈 게 없다. 안전한 관계라는 가림막 뒤로 옹송그려진 외로운 어깨들이 있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농도조절은 각자의 몫이다. 가까이에서 자주 오래 보자는 약속은 허망하다. 두어 번쯤 실망하고 두어 번쯤 서운해하면서 뜸하게 연락을 이어가다가 습자지에 그어진 연필자국처럼 서로의 이름을 지워간다. 친밀하지만 깊숙하지 않고 완고하지만 언제든 토닥토닥 안아줄 정도는 되는 거리. 그 반대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묽음.


그날은 마음에 힘이 쪽 빠진 날이었다.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할 겸 책상 위를 주섬주섬 치우다가 불그죽죽하고 물컹한 것에 손이 닿았다. 구석에 있기도 했지만 언뜻 보아서는 형체도 가늠되지 않았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아득한 채로 심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것. 살아있는 생물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손바닥에 쥐어보았다. 감처럼 농익어 터지거나 사과처럼 곪지 않고 오직 쪼그라들고 있었다. 마음 없는 주인에게 어필하느라 질질 짜거나 무너지지 않고 거리를 지키면서, 책상 귀퉁이에 어깨를 옹송그린 채로.


오목하게 쥐어보았다. 얇고 질긴 껍질로 알멩이를 지켰을,, 속절없는 세월에 당도만큼은 꽉찼을 나의 자두가 갑자기 먹고싶어졌다. 뒤늦은 후회라고 해도 좋고 별난 식성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도 전보다 빛깔은 더 붉어졌다. 태양과 대지로부터 부여받은 소명대로 어느 귀퉁이에서건 제 몸 덥혀 발그죽죽하게 익어간 에로틱한 열매라니.  


신기하게도 마음에 힘이 스며들고 있었다. 닫았다고 생각한 곳에 틈이 생기고 여전히 마음이 향한다면 어떤 말도 아직은 이르다. 머잖아 완전히 닫힐지 아니면 세월을 이겨내고 공고한 바람벽이 되어줄지 지금은 판단할 수 없다. 해보자고 생각했다. 몇 번이고 하다보면 한 발짝은 옮겨져있겠지. 해보자, 나의 소명대로.

영롱하고 호방하다, 너여!

* 한껏 능욕당해 외양은 쇠락했어도 당도만큼은 정점을 찍고 있는 열 두 알의 자두를 꺼내 정갈히 씻고 물기를 닦아 씨를 빼내 조분조분 칼로 썰었다. 세 시간 정도 설탕에 재워두면 삼투압 때문에 자두의 수분이 빠져나오는데 이 상태로 만들어서 불에 올리는 것이 좋다. 끓이기 좋은 상태일 뿐 아니라 오래 끓여도 점잖게 졸아든다.

처음엔 뚜껑닫아 끓이면 되니까 느긋하게 딴 일을 하자. 부르르 끓어오르면 이때부터 주걱과 거름망을 준비하고 불 앞에 선다. 잼 만들기는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라야 알맞다. 책상귀퉁이, 냉장고 과일칸, 다용도실 종이상자 안에 유배돼있던 과일들이 오라를 풀고 환골탈태하기 좋은 시간이다. 무른 육질이 설탕에 엉겨붙어 뭉근하고 시큼하다가 단맛이 서서히 끓어올라 깊은 향내가 진동하면 사방이 아파트인게 분명한데도 어디선가 약이 오를대로 오른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거품 걷는다고 유난떨지 않아도 알아서 퐁퐁 터져주지만 그래도 난 좀 깔끔한 편이라는 사람은 촤르륵 얌전하게 걷는다. 눌러붙지 않게 바닥을 젓듯이, 차듯이 노를 저어준다. 촤압촤압촤압, 이런 느낌. 불에 올려있을 땐 묽어보여도 불 끄면 굳어서 꾸덕해지니까 주걱으로 들어올려봤을 때 뚝뚝 떨어진다 싶으면 끝.

껍질은 벗기지 않았다. 내게 가장 큰 영감을 준 부위(?)이기도 하고, 여름과 가을 사이에 나는 과일 가운데 자두가 갖고있는 확실한 존재감이 바로 이 껍질에 있다는 것을 알게됐으므로. 이 호방한 기운으로 영글어간 꽉찬 영양 놓치지 않을 거야. 붉은 자두가 아니었어서 누리끼리한데 나는 이 호박색이 왜 이렇게 좋은 것이지? 중년도 낯선 판에 할매로 직행하려나?

  

내가 좋아하는 딱딱하고 고소한 독일빵과 만나니 저세상 마리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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