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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중력

by 김준식

내 생의 중력


살아오면서 아픔 하나 없는 인생이 없다. 자신에 다가온 모든 일은 타인의 그것보다 엄청나고 타인의 그것보다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주말 아침엔 언제나 산행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지만 오늘 아침은 조용하게 거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을 감상하기로 한다.


문득 2004년 혜성 연구를 위해 발사한 혜성 탐사선 로제타(알고 있는 것처럼 이집트 문자 해독의 단초를 제공한 로제타 스톤에서 따온 이름)호 생각이 났다. 우주를 떠도는 혜성에 안착한 로제타호 이야기에서 내 마음을 끄는 이야기는 10년간 65억 km를 여행하여 추류모프-게라시멘코 혜성에 착륙하는데, 그 혜성의 중력이 너무 작아 조그만 충격에도 로제타호가 다시 우주로 튕겨져 나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지구의 중력에 내 몸을 맡긴 지 올해로 63년째, 어김없이 지구는 나를 잡아두고 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문득, 내 생의 중력은 여전히 내 삶을 굳건하게 잡고 있는지 혹은 로제타호가 내려앉은 그 혜성처럼 중력이 약하여 내 삶을 우주로 튕겨낼 것인지에 대해 햇빛 쏟아지는 초 여름날 오전 곰곰이 생각해 본다.


관계의 전제는 실체에 있다. 우리말로 실체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서양에서 유래된 말이기 때문이다. 실체는 영어 Substance의 우리말 譯語다. Substance는 희랍어 히포케이메논(hypokeimenon)을 라틴어로 번역한 스브스탄티아(substantia) 또는 수브스트라툼(substratum)에서 유래한다. 희랍어 히포케이메논(hypokeimenon)은 여러 가지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불특정 존재를 말한다.


그러므로 관계는 다양한 속성을 가진 우리 모두가 그 대상이다. 관계가 유지된다는 것은 그 속성이 여러 모로 잘 맞아떨어진다는 증거이고 훼손은 속성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일 것이며 복원은 충돌 부분이 사라지거나 그 조차도 맞아지는 것인데 여기에는 인간에게만 특별히 존재하는 화해, 이해, 배려라는 기제가 작동하게 된다.


퇴직을 앞두고 나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아주 단출해질 것인가? 아니면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인가? 훼손, 복원, 충돌은 또 어떤가? 어느 것도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제는 나의 중력장에 이끌리는 관계에 대하여 최선을 다 할 뿐이다.


주말 오전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야말로 ‘내 생의 중력’을 느낀다.


표지 그림은 독일 출신 풍경화가 칼 블레첸(Carl Blechen, 1798~1840)의 작품 Bau der Teufelsbrücke(악마의 다리 건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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