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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Sep 30. 2018

일상의 反芻(반추)

1. 아델 - Hello


2015년 이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지금도 그 말초적 자극의 강도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만큼 강렬했다. 주말을 보내며 이 음악을 듣는다.


아래 글은 2015년 당시 쓴 글이다. (폰트를 달리 한 것은 과거의 글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


우리나라 나이로 올해 28살인(이제 서른이 넘었다.) 영국 토트넘 출신의 이 여자 가수가 최근 발매한 “25” 앨범에 실린 타이틀 곡이다. Adele은 Soul, R&B로 분류되는 가수인데 음색은 두텁고 약간은 거친 느낌이 나지만 송곳처럼 날카롭기도 한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음악 느낌은 폭발적 강력함과 심지어 저항감까지 느끼게 한다. 이러한 그녀의 음색과 음악적 특성은 그녀 개인의 삶이나 태도와도 무관하지 않겠지만 그녀의 음악 즉, Soul, R&B의 음악적 특성에 기인하는 바도 크다.


Soul, R&B


Soul이나 R&B의 더 큰 범주는 블루스(Blues)다. 블루스의 범주에 속하는 음악은 Soul, R&B, Gaspel, Jazz, Rock 등인데 그 특징은 강한 감정과 간절함이 묻어나는 음악이라는 것이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음악은 흑인들, 아프리카가 고향인 노예들이 아메리카로 유입되어 오면서 흑인 고유의 음악에 그들이 살고 있는 아메리카의 풍토가 적절하게 흡수되어 형성된 음악이 블루스다.


블루스라는 말도 남부 아프리카 사람들이 장례식 때 즐겨 입던 옷 색에서 유래된다. 이 청색의 염료 원재료는 인디고 테라 틴토리아라는 식물이다. (지금도 인디고 블루라는 색이 있다. 청바지의 색도 이로부터 유래한다.) 흑인 노예들이 아메리카에서 이 식물을 발견하고 두고 온 고향 생각을 하며 그들의 옷에 푸른 물감을 들이고 또 푸른 느낌(아프리카의 멜로디 특히 타악 중심)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런 것으로부터 블루스라는 장르의 음악이 생겨 난 것이다.


특히 Soul은 이러한 블루스 중에서도 흑인 특유의 자긍심과 종족적 우월감을 표현하기 위한 음악을 말한다. 동시에 강한 개인적인 감정(이별, 슬픔, 죽음)이나 이로부터 파생된 강력한 메시지의 전달, 그리고 매우 극적인 느낌까지를 포함하는 음악이 Soul이다. 따라서 Soul은 날카롭고 폭발적인 것으로부터 감정이 상승하여 마치 흐느끼는 듯한 느낌의 음악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2018년 세상을 떠난)

유명한 Aretha Franklin의 Soul을 들으면 이 모두를 다 느낄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fIAM5dzuDs


영국 대중음악(British Pop)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비틀스 이후로 pop의 주류가 한 때 영국으로 간 적이 있었다. 지금이야 미국이라는 초 거대 시장이 영국을 포함하고 있지만 비틀스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6~70년대는 영국 pop이 세계 주류 음악으로 명성을 날렸다. British Pop(브리티쉬 팝)은 그 뒤 Pink Floyd, Led Zeppelin 등 기라성 같은 밴드를 탄생시키게 되는데 이들의 음악적 배경은 놀랍게도 블루스의 한 장르인 Rock이었다. 정확히는 Alternative(얼터너티브) Rock이라고 부르는데 Alternative란 주류 음악시장 규칙과 관습적 사운드를 거부하는 음악 태도를 말한다. 


Adele은 이러한 브리티쉬 팝의 자양분을 토대로 탄생한 Soul 가수이다. 그녀의 음악은 일견 음울하고 둔중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폭발적인 느낌도 내재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매우 유려한 느낌도 간간히 감지할 수 있는 음악을 구사하는 그녀가 이번에 발표한 앨범의 타이틀 곡이 바로 Hello다.  


Hello

https://www.youtube.com/watch?v=YQHsXMglC9A

Soul 특유의 미분적 반음(피아노로 표시되기 어려운, 오직 사람의 음성으로만 표시되는 반음, 특히 Soul에는 미 b, 파#(이 음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등 정통 클래식에서는 구사하지 않는 음 높이를 목소리로 구사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첫 소절의 I was wondering if after all these years는 악보상 동일한 음 높이지만 Adele의 노래는 미묘한 음 높이의 차이가 난다.


대체로 이런 음악적 방법을 우리는 블루노트라고 부르는데 Adele의 음악에서도 자주 보이는 방법이다. 그 외에도 싱코페이션(당김음)이나 임프로비제이션(즉흥 음악 – 특히 고음에서 등장하는)이 있는데 전체 앨범에 이런 부분이 가끔씩 보인다. 


누구나 삶에 회한이 있다. 특히 남녀의 이별에 대한 회한은 본인의 경험 유무에 관계없이 공감하는 삶의 회한이다. 하기야 희미한 관계이기는 해도 누구나 한두 번, 이별 없이 일평생을 사는 사람은 없을지 모른다. Adele은 그 절묘한 느낌을 전화라는 모티브를 이용하여 노래한다. 피아노 건반으로 시작되는 처음은 매우 어둡고 둔중하며 혹은 아득하기도 하다. 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Hello, it's me (여보세요, 나야) 이제는 헤어져 남남이 된 연인에게 전화를 걸어 보지만 전화가 연결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나야 라고 이야기를 꺼내는 그 아프고 절절한 생각이 노래를 지배한다. 


오늘 저녁 아주 편한 마음으로 깊숙하게 자신을 소파나 쿠션에 묻고 이 음악을 들어 보라! 그리고 지난날 헤어짐으로 가슴 아파했던 그 순간을 떠 올리며 이 계절의 공기를 가슴 깊이 느껴보자.  
 



2.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논리 철학 논고) - Ludwig Wittgenstein 1922


천재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하지만 좀처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2014년 2월쯤 아마존에서 이 책을 구매했고 또 한동안 잊혔었다. 작년 여름방학을 넘기면서 약간의 심리적 위약감을 느끼게 되었다. 즉, 책을 사놓고 읽지 못하는 불안과 외국어 해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등이 나를 괴롭혔고 그 상황을 돌파하는 것이 바로 책을 읽는 것이라 판단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이 2015년이다. 그리고 다시 2018년 5월 다시 이 책을 읽기 시작했고 드디어 오늘 그 끝에 도달했다.


하지만, 

책을 펼쳐 읽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내 평범성의 절감이었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세계에 존재하는 천재의 생각에 절망하면서 이 책을 읽기 위해 또 다른 책을 읽어야 하고 다시 또 다른 책을 찾아보아야 하는 무한 루프에 빠지고 말았다.


드디어 오늘 이 책의 마지막 장, Distinction between saying and showing(말할 수 있는 것과 보여지는 것의 구분)의 끝에 도달하였지만 오히려 머리 속은 하얗게 지워질 뿐, 어떤 잔존물도 남아 있지 않음을 밝혀 둔다. 지금 쓰는 이 글은 책 읽는 사이사이 기록에 의존하여 쓰는 글인데 이렇게라도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극 미량으로 내게 남아있는 이 위대한 천재의 자취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엄청난 건방짐이고 무례지만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즉, “이 책은 철학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문제들이 제기되는 이유는 우리의 언어가 갖는 논리적 오류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의 말을 통해 이 책이 가지는 의도와 목적을 알 수 있다. 즉, 『논리․철학 논고』가 말하는 최종 명제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명제를 내어놓기 위해, 그것에 앞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려는 비트겐슈타인의 노력이 이 책의 과정이다.


사실 이런 노력은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인 노력이다. 누구도 이 상황(말할 수 있는 것, 또는 없는 것)에 대한 설명하기를 요구한 적도 또 요구할 필요도 없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매우 정교하게 이 일을 설명하고 있다. 다만 나의 능력이 따르지 못할 뿐. 책 중간에 나오는 명제(These)의 문제를 읽기 위해 고등학교 1학년 수학책을 본 기억이 난다. 진리 함수(truth function)라는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 수학 및 다른 책들을 찾아보면서 스스로 학문의 얕음을 통탄한 적도 많다.


『논리․철학 논고』는 언어의 본질 및 그 기능과 구조를 탐구하는 것이며, 논리학의 본질과 언어와 세계의 연관성을 주요 과제로 삼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논리․철학 논고』에서 다룬 언어관을 언어 그림이론(The picture theory)이라 한다. 그림이론은 두 개의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구성되는데 두 물음이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어떻게 명제를 이해할 수 있는가?' – 명제 그림이론

'명제의 진리 값은 어떻게 결정되는가?'이다. – 명제 진리 함수론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명제와 그림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을 봄으로써 우리는 그것이 어떤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림으로부터 그 상황을 ‘읽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그림은 그것이 표현하는 바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명제를 통해서도 우리는 그것이 나타내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우리는 명제로부터 그 상황을 읽어 낼 수 있다. 명제도 그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명제는 그 의미를 ‘보여 준다’. 명제는 사물이 어떠한가를 말하고 있다.” 이 점에서 명제와 그림은 서로 공통된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명제 그림이론에 대한 설명)


비트겐슈타인은 명제의 진리 값은 사실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한다. 이것은 언어 그림이론의 귀결이기도 하다. 명제가 사실의 그림이면 그 명제가 바른 그림인지 틀린 그림인지는 사실에 의하여 결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의 진리 값은 사실과의 비교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다.(명제 진리 함수론에 대한 설명)

(중략)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논리․철학 논고』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논리․철학 논고』의 최종 명제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책 속에서 끝없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려 하였으며 ‘말할 수 있는 것’은 언어 그림이론을 통해 증명하려 하였다. 


또 ‘말할 수 없는 것’을 내버리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여지는 것(Showing)”이요 “드러나는 것(Expressing)”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 바깥에, 말할 수는 없지만 “보여지는 것”의 영역이 있음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곧 말할 수 있는 ‘사실’의 영역과, 말할 수 없는 ‘가치’의 영역이 공존하고 있지만 서로 융합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이 가지는 철학적 함의에 대해 감히 이야기할 수는 없다. 다만 나의 소견으로 볼 때 우리의 삶에서 생겨나는 대부분의 언쟁이나 갈등 등은 결국 사실적이고 진위 판단 가능한 영역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판단적이고 진위 여부를 따질 수 없는 영역에서 기인하고 있다면 이 책의 내용은 매우 실용적이고 적용 가능한 철학적 접근일 수 있다.


21세기는 모든 문제를 과학적 사고로만 접근한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세계는 과학적 사고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세계가 있고 언어적, 예술적, 종교적 사고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세계가 따로 있는데도 과학적인 사고를 통해서만 세계를 설명하려 하고 있다. 20세기 초 위대한 천재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미래의 문제를 알았을 리 없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나의 머리 속에 존재하는) 세계의 이해의 편협성과 논리적 오류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과학적이라는 말로 치환되어 나타나는 수많은 이야기들에 대해 깊은 반성의 계기가 된 것은 틀림없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명제에 도달한다.

"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sil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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